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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식지/마음거울

<제 61호> 생명 있는 모든 것을 대하는 자세 _이영희(회원, 원영한의원)

by 사람이 되어 숨을 쉬었다. 2019. 9.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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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 두세 살쯤 일이다. 외출에서 돌아온 어머니 손에 무언가 들려 있었다. 머리가 사라진 죽은 비둘기였다. 흠칫 놀랐다. 사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나도 그 비둘기를 보았다. 하지만 모습이 너무 처참해서 저만치 뒷걸음쳐 돌아왔던 거다. 어머니는 비둘기를 마당 한쪽에 가만 내려놓더니 다시 밖으로 나가셨다. 한참이 지난 후 어머닌 밝은 얼굴로 돌아오셨다. 손에는 비둘기 머리가 들려 있었다. 어머니가 자초지종을 얘기해 주셨다.

 

 

<집 근처 공사장을 지날 때 저만치 앞에 비둘기가 죽어 있는 게 보였다. 공사 중이니 아마 저 위에서 벽돌이나 다른 무언가가 비둘기 머리 위로 떨어진 것 같다. 아무리 둘러봐도 몸통만 있어서 우선 그것 먼저 수습해 왔다. 하지만 없어진 머리가 계속 마음에 걸려 안 되겠더라. 그래서 되돌아가 기어이 찾아왔다.>

 

 

그제야 어머닌 방에 들어가서 한 번도 입지 않은 깨끗한 메리야스를 꺼내오셨다. 그리고 비둘기 염하기를 시작하셨다. 떠들거나 끼어들면 안 될 것 같은 그런 엄숙함이 느껴졌다. 어머닌 그 비둘기를 안고 산으로 올라가셨다. 숲이 우거진 곳으로 들어가 땅에 묻고는 한참을 기도하셨다. “극락왕생 극락왕생...” 나중에 어머니께 왜 그리 했는지 물으니 대답은 간단했다. 그렇게 죽은 것도 서러운데 지나가는 사람들 구경거리 되는 게 마음 아파서란다.

 

 

사실 어머니의 그런 모습은 낯설지가 않았다. 집에서 키우던 강아지 <해탈이>가 죽던 날도 그랬다. “영희야, 해탈이가 죽었다. 따라 와라.” 그 날도 어머닌 강아지를 염해서 산으로 올라가 묻고는 기도를 하셨다. 살아있는 누군가에게 이야기 하듯, 가까운 가족을 떠나보내듯 언제나 애틋한 모습이었다.

 

 

불교에서는 윤회를 말한다. 카르마에 따라 나고 죽음을 반복하니 비둘기와 강아지도 과거 어느 생 나와 인연이 깊었던 존재였는지 모른다. 그리고 내생에 또 어떤 인연으로 만나게 될지도 알 수 없다. 그래서였을까, 어머닌 늘 따뜻한 눈으로 생명을 대하셨다. 난 어머니를 따라할 만큼의 그릇은 아니었지만 살다보니 내게도 기회가 찾아왔다. 우암산 우회도로를 걷고 있을 때였다. 하필 커다란 방아깨비 한 마리가 찻길 중앙에 떡하니 앉아 있는 게 아닌가. 그 때만 해도 옛날이니 차량 통행이 적었지만 운이 없으면 지나가는 차에 치일 수 있겠다 싶었다. 그래서 방아깨비를 풀숲으로 몰기 시작했다. 거의 다다랐을 무렵, 차 한 대가 내려오는 게 보였다. 난 급히 몸을 피했지만, 방아깨비는 그만 차에 치어 버렸다. 형체를 알아 볼 수 없을 만큼 뭉개져 검처럼 아스팔트에 붙어 있던 방아깨비. 내가 그냥 가만 두었더라면, 반대 방향으로 몰았더라면... 살 수 있었을까? 그 일은 오랫동안 나에게 상처로 남았다.

 

 

거짓말처럼 세월호가 수면 위로 떠올랐다. 수많은 사람들이 만약에...” 하며 돌이키고 싶었던 시간이었다. 같은 시공간을 나눴던 친구들은 얼마나 힘든 나날을 보냈을까. 자식을 잃은 부모의 마음은 또 어떠한가. 그 분들의 슬픔은 <애절함과 간절함>으로 표현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하고, <세월이 약이다>는 말도 고맙지 않은 위로였을 게다. 그것은 같은 경험을 가진 사람만이 알 수 있는 절대적 깊이의 슬픔이다. 하여 나 또한 지난 3년은 고통이었다. 이제라도 다행이다. 사랑하는 가족의 품으로 돌아올 수 있게 되었으니. 그리고 진실에 한걸음 다가설 수 있게 되어서 말이다. 생명 있는 모든 것은 살아서도 죽어서도 존엄함을 잃어서는 안 된다. 그것은 모두가 누려야 하고 또한 서로가 지켜주어야 할 기본적인 일이다.

 

 

#이영희 #마음거울 #숨소식지 #제6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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