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8년 4월, 시인 김수영은 펜클럽 주최한 문학 세미나에서 「시여, 침을 뱉어라 - 힘으로서의 시의 존재」라는 주제의 강연을 했다. 이 강연에서 김수영은 영국 시인 로버트 그레이브스의 말을 한 대목 인용한다. “사회생활이 지나치게 주밀하게 조직되어서, 시인의 존재를 허용하지 않게 되는 날이 오게 되면, 그때는 이미 중대한 일이 모두 다 종식되는 때다. … 사람이 고립된 단독의 자신이 되는 자유에 도달할 수 있는 간극이나 구멍을 사회기구 속에 남겨놓지 않는다는 것은 더욱더 나쁜 일이다. 설사 그 사람이 다만 기인이나 집시나 범죄자나 바보얼간이에 지나지 않는다 하더라도.”
‘사회생활이 지나치게 주밀하게 조직’되면 숨이 막힐 것이다. 그레이브스의 이 말을 들으니, 지난 2월 28일, “다른 사람에게 구걸하도록 시켜 올바르지 아니한 이익을 얻은 사람 또는 공공장소에서 구걸해 다른 사람의 통행을 방해하거나 귀찮게 한 사람”을 벌할 수 있는 경범죄처벌법 개정안이 국회에서 확정되었다는 신문 기사가 떠오른다. ‘구걸’을 직업으로 삼는 이들도 소수 있겠지만 세계 13위의 경제력을 갖춘 국가에서 오죽하면 ‘구걸’을 하겠는가. 관리 책임을 맡은 이들은 ‘사회 안전망’ 같은 것을 생각하기보다는 ‘국가 이미지를 떨어뜨리는 이’들을 ‘청소’하는 일에만 관심이 있다.
덩달아 ‘고립된 단독의 자신이 되는 자유’도 점점 위축되어 간다. ‘학교’에 다니는 우리의 어린 이웃이 점수 경쟁에서 잠시나마 벗어나 숨 고르기를 할 틈도 사라지고 있다. 말마따나 ‘방학(放學)’은 학업에서 풀려나 ‘단독자’가 되어 맘껏 자유를 누리는 기간인데도 그렇지 못하다. 이 사회를 책임지고 있는 4, 50대 장년층들 자신들은 어린 시절, 맘껏 ‘방학’을 만끽하며 자신의 고유한 꿈을 키워갔으면서도 그야말로 ‘사랑하는’ 자신의 아이들에게서 ‘방학’의 권리를 맘대로 박탈하고 있다. 어느덧 ‘일하지 않는 자, 먹지도 말라’는 근대화의 계명을 절체절명의 준칙으로 삼게 된 까닭이리라.
일방적이다. 그래서 폭력적이다. 어떻게든 타인보다는 한발이라도 앞에 서 있어야 하고, 조금이라도 뒤쳐진 타인은 ‘나’와는 다른 존재로, 아니 ‘나’보다 못한 존재로 여겨야 한다. ‘나’보다 나은 이들은 나의 우상이 된다. 사회는 수평적이지 않고 수직적이다. 이 사회의 꼭대기에는 화폐와 권력과 명예로 무장된 ‘인신(人神)’들이 거주하고 있다. 20세기의 파시즘이 군사적 물리력에 의해 조직된 전체주의 사회라면, 21세기의 파시즘은 물신주의(物神主義)로 조직된 민주주의 사회다. 우리 사회의 민주주의는 ‘눈에 잘 띄지 않도록’ 만들어진 수직 구조로 되어 있다. 이른바 ‘스펙터클-민주주의’다.
그러므로, 추악한 사회의 실체를 엿보게 하는 ‘구걸 행위’가 눈에 띄어서는 안 된다. 그 뿐인가. 미국의 중산계급 문화 속에서 ‘장애’는 발설되지 않아야 하는 것, 보아도 보이지 않는 것으로 취급된다. 아이들은 자신이 만나는 사람의 손상을 가리키거나, 응시하거나, 언급하지 않도록 교육받는다. “우리는 그렇게 다루어짐으로써, 매우 민감하고 불편하게 인식되는 존재 대신 누구도 ‘이해하지’ 않는 존재가 되는 역설적 상황에 이르게 된다.”(우리가 아는 장애는 없다 6장 「사회적 만남들」) ‘장애’가 있는 사람은 ‘에티켓’이라는 이름으로 ‘보이지 않는 인간’이 된다.
늘 만나고 서로 사랑하며 함께 살아가는 인간은 ‘가시적인 영역’이라는 곳에 따로 존재하는, 희한한 시스템이 만들어진다. 언론은 항상 똑같이 ‘위기’를 선전하고, 정부는 ‘비상 사태’를 선포하여 ‘질서 유지’를 명목으로 한 ‘보안 시스템’을 가동시킨다. 일련의 인간들이 ‘관리’된다. 그들은 사각지대(死角地帶)에 설치된 ‘수용소’에 있다. 조르조 아감벤이 말한 ‘호모 사케르’, 즉 관리 받는 사람들은 ‘사회 질서’라는 통치력을 유지시키기 위해 필수적으로 요구되는 ‘신성한 제물’들이다. 특히, 지구 북반부 국가에서 ‘장애인’이라는 존재는 전형적인 ‘호모 사케르’다.
“장애에 대한 서구적 개념들은 입법을 통해 보편적인 규범체계를 부과하려는 중앙집권주의적 국가라는 맥락 속에서 형성되었다.”(위의 책, 서장 「장애와 문화」) 쉽게 말해, ‘장애인’의 성격과 범위를 어떻게 설정할 것인가, ‘장애인’에게 어떠한 사회적 장소에 배치할 것인가, ‘장애인’의 자활을 위한 제도적 장치를 어떻게 구성할 것인가 등을 주요 업무로 하는 기관들을 설치하여, 장애인을 효율적으로 ‘관리’하고 은밀히 ‘배제’하는 시스템을 만들어낸 것이다. ‘인격⋅정체성⋅가치 개념’마저 그러한 제도들에 의해 재규정된다. “역설적이게도, 그들은 사라지기 위해서 명시되었고, 언급되지 않기 위하여 이름을 부여받았다.”(앙리-자크 스티케) 푸코가 말한 ‘생명관리정치’에 다름 아니다.
우리가 아는 장애는 없다(1995)는 노르웨이의 의료인류학자 베네딕테 잉스타, 덴마크의 인류학자 수잔 레이놀스 훼테가 엮은 책이다. 이 책은 ‘장애’에 관한 비장애인들의 태도와 습관, 장애인 자신의 느낌과 판단, 장애의 사회 수용과정, 장애와 정치 등 수많은 현장 사례와 함께 논쟁적 쟁점들을 과감하게 제시하면서, ‘장애’에 관한 일반적이고 상식적인 통념들을 통렬히 논박한다. 이로써 우리는 “인간 이하의 시선에서 세상을 경험하고 또 바라볼 기회를 지닌 장애인들, 다양한 기계나 인공물을 이미 자신의 일부로 받아들이는 중증장애인들은 그러한 존재론적 평등성을 훨씬 더 잘 구현할 수 있는 잠재력을 지닌 존재들”이라는 옮긴이의 주장에 흔쾌히 동의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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