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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식지

<3호> ‘잃은 것’에 관한 슬픈 회상에서 터져나오는 -보토 슈트라우스의 커플들, 행인들_ 소종민(공부모임 책과글 대표)

by 사람이 되어 숨을 쉬었다. 2020. 8. 7.

잃은 것에 관한 슬픈 회상에서 터져나오는 보토 슈트라우스의 󰡔커플들, 행인들󰡕

_ 소종민(공부모임 책과글 대표)

 

독일의 극작가 보토 슈트라우스(1944)의 산문집 󰡔커플들, 행인들󰡕(1981)에는 여섯 편의 글이 실려 있다. 다섯 번째 글인 단독자들에서 슈트라우스는 단독자는 때때로 관찰을 위해 태어난 사람처럼보인다고 말한다. 이 산문집에 실려 있는 놀랄 만큼 섬세한 관찰의 기록으로 짐작건대, 슈트라우스 역시 단독자이다. 슈트라우스가 말하는 단독자란 단독자들의 모임에도 끼지 못하는 단독자로서, 자칭타칭으로 진정한 아웃사이더다. 이런 사람의 유일한 행위는 관찰일 수밖에 없지 않을까. 외로움 같은 것마저도 무뎌져 있을 것이다. 거리나 카페, 호텔이나 바(bar), 바닷가나 아파트 같은 곳에서 만나는 사람들, 즉 커플들이나 행인들의 모습에서 그들의 사연을 추정만 할 뿐, 이들의 세계에 참여하지 않는다. 아니, 참여할 수 없다. 그저 관찰하고 또 관찰한 결과를 일방적인 상상과 단독자의 통찰을 동원하여 실상에 근접하리라는 기대감이 내포된 스케치만을 제출하는 것이다.

슈트라우스가 관찰한 커플들, 이를테면 다음과 같다. 자리에 돌아왔으나 아내가 사라졌음을 깨달은 남편, 수차례 결별에 실패하여 늘 끝에는 폭력을 일삼던 팔로 서로를 포옹하는남녀, 밀회의 쾌감으로 귀가 시간을 놓친 두 남녀의 조급한 마음, 투신 소동으로 애인에게 진실함을 증명하려는 어떤 여자, 아침에 돌아왔으나 반쯤 불에 탄 집을 보게 된 유부녀, 4년만에 다시 만나서도 나의 과오를 침착하게 나열하는 여자의 끔찍스런 키스, 자신의 지적 능력을 과시하고 싶은 남편과 무표정한 아내, 주말이면 마약중독자 클럽으로 바람쐬러 나가는 사무원 부부의 기이한 열정, 동반자살에 성공한 노부부, 아이슬란드 북쪽 해안에서 목격한 바다와 대지의 성교, 출산으로 창의력을 잃었다고 주장하는 디자이너, 노래 소리로만 존재하는 그녀 등.

이 산문집의 첫 번째 글인 커플들에는 수많은 커플들이 등장한다. 우리도 주변에서 또 어디에선가 보았고, 또 우리 자신도 체험했던 그런 사연들이 표현되어 있다. 커플들을 읽으면, 사람이라는 존재자들이 여럿이면서 또 하나이고, 하나면서 또 여럿인 것으로 느껴지고 인식된다. 같고 다르며, 또 다르면서 같다. 동일성과 차이가 겹쳐 있는 형상이다. 그것은 마치 내 자신이 하나이지만, 내 안에 너무 많은 내가 있는 것이 느껴지듯 말이다. 슈트라우스가 전하는 현대사회의 커플들은 대개 온전치 못하다. 커플들에서 짝은 대체로 남자와 여자로 이루어져 있지만 간혹 남자와 남자, 여자와 여자로 표현된다. 서로 이상적인 관계를 욕망하지만 서로의 욕망은 늘 어긋날 뿐만 아니라 자신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조차 불분명하므로, 이제 첫 만남을 성사시킨 커플에서부터 평생 함께 지낸 커플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흔들리고 있다.

우리가 그렇게 지난하게 감상적으로 애도하는 이유는 무엇보다도 우리가 너무 고독하다는 것과 우리의 사회적 결속이 2인용 감방을 결코 넘어서지 못하기 때문은 아닐까? 이 감옥에 우리는 각각 어머니, 아버지, 연인, 아이와 함께 단둘이 갇혀 있다. 사랑하는 한 사람을 잃는 순간 세상은 무너지고, 그제야 비로소 우리가 얼마나 사회성이 결여된 삶을 살아왔는가 하는 것이 드러난다. 그곳에는 자기 보존 및 그 모든 구성원의 보존을 위협하지 않기 위해 우리의 망각과 활동력을 전적으로 필요로 하는 어떤 살아 있는 공동체도 존재하지 않는다.”(커플들) ‘소외(疎外)’란 이런 것이다. 헐겁고 텅 빈 관계에 놓인 현대인들에게 우울증은 기본적인 심리상태이다. 대상 없는 슬픔, 슬픔조차 말라버린 공허함, 인간이되 비-인간으로 사는 것.

이와는 반대로, 슈트라우스는 밤새 복통을 앓던 아이를 매장하고 홀연히 길을 떠나는 인디언 여인에게서 극복과 구원의 힘을 발견한다. 크메르 루주군에게 처형 당하기 직전 아내에게 사랑의 편지를 보낸 캄보디아인에게서는 선명한 슬픔과 아름다움의 이상을 얻는다. 나아가 필자가 바다와 대지를 성적 관계로 엮어 묘사하는 까닭은 관계를 자연으로 확장하고 다시 자연이라는 온전함으로 현대 사회를 치유하고 싶은 필자의 간절한 욕망 때문이다. 슈트라우스는 밀집된 사회조직, 직업이 요구하는 속도, 화폐와 미디어가 창출한 가상(假像)관계를 불구로 만드는 것이라고 말한다. 5분전에 헤어진 친구가 자동차를 탄 나를 알아보지 못하고 주먹을 흔들며 욕해대는 사건, 3년전 비 한 방울에도 다칠까봐 전전긍긍하게 만들던 그녀가 거리에서 나를 알아보지 못하고, 나 또한 무심해져 있음을 깨닫는 충격……. “그것은 나에게 아주 친근한 사람을 다시 낯선 사람으로 바꿔버린 이해할 수 없는 법칙으로 다가왔다. 망할 놈의 행인의 세계여!”(차량의 강물)

책 한 권으로 보토 슈트라우스라는 인물을 제대로 파악할 수는 없겠지만, 유사-단독자가 되어 그의 실상에 근접해 볼 때, 그는 대인기피증에다가 폐쇄적인 생활을 할 듯하고, 까칠한 성격에 독단적인 판단을 일삼아 주변 문인들과 늘 마찰을 벌일 듯하다. 아닌 게 아니라 그는 1993번져가는 속죄양의 노래라는 글을 <슈피겔>지에 발표하여, 이른바 좌파 담론과 생태환경 담론으로 무장된 지식인들과 대대적인 논쟁을 벌였다고 한다. 아마도 그는 관계의 파괴와 소멸에 무감한 채 관념의 성채를 쌓아올려 명성과 권력만을 추종하는 지식인들의 천박한 욕망에 구역질이 났던 것이리라. 관계 회복의 열망으로 가득한 그의 표현이 주류의 심기를 건드렸으리라는 점은 분명해 보인다. 그는 단지 잃은 것에 관한 슬픈 회상에서 터져나오는, 단독자로서의 윤리적 표현에 충실하려고 했을 뿐인데 말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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