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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식지

<4호> 한국전쟁과 3인의 트라우마_박만순(함께사는우리 대표)

by 사람이 되어 숨을 쉬었다. 2020. 8. 7.

 

1. 생존자 김기반의 트라우마

죽음의 구렁텅이에서 기적처럼 살아난 김기반 할아버지와의 첫 만남은 20061월 노인회관 할머니 방이었다. 2005년 제정된 과거사법을 설명하고, 강내면 탑연리 보도연맹 사건을 묻고자 했다. “저쪽으로 가서 얘기하지하며 데리고 간 곳은 할머니 방. 다행히(?) 아무도 없었다. 할머니 방에서 남자들끼리 남이 들을 새라 조그맣게 이야기는 시작되었다. 이야기는 술술 풀리지 않았다. 이방인의 쏟아지는 질문에 노인의 입은 잠깐 열릴 뿐이었다.

20여 차례의 만남을 통해서 강내면 보도연맹 사건의 진실이 밝혀졌다. 강내면 보도연맹원 67명이 대한민국 군경에 의해 학살되었고, 당신은 학살 집행 전 탈출을 해 살아났다는 것이다. 김기반의 증언은 언론과 진실화해위원회의 집중조명을 받았다. 보도연맹 사건 생존자는 많지만, 공개적인 증언을 대부분 꺼렸기 때문이다. 필자는 김기반 옹을 수년간 지켜보면서 마음이 편치 않았다. 가족과 친척들이 경계하고 싫은 소리를 했기 때문이다. 진실화해위원회의 진실규명 이전에는 왜 다 지난 얘기를 들추느냐? 빨갱이 소리 듣고 싶냐?”며 책망을 받았다. 정부의 진실규명과 배보상 민사소송이 이어지자, 친척 중에는 왜 진작 알려주지 않았느냐며 정반대의 입장에서 원망의 목소리를 높였다. 역사의 피해자인 구순의 김기반 옹이 가족과 친척, 마을 사람들로부터 받은 상처는 국가로부터 받은 상처보다 훨씬 작을까?

 

2. 가해자 김만식의 트라우마

20071113일 진실화해위원회 사무실에는 한국전쟁 당시 발굴된 유해와 유품이 전시되었다. 유해와 유품을 둘러싸고 언론사 기자들이 카메라와 녹음기를 81세의 노인에게 집중적으로 들이댔다. 한 기자의 질문. “보도연맹원 처형 관련자로서 현재의 심정을 말해 주세요괴로운 얼굴을 하고 있던 김만식 선생은 잠시 뜸을 들인 뒤 답변을 했다. "사람이 사람을 죽인다는 것은 극단의 행동입니다. 죄가 있었건 없었건 간에 사람을 해친 데 대해 죄책감을 느끼고 있습니다" 김만식 선생은 한국전쟁 당시 6사단 헌병대 일등상사였다. 전쟁 발발 직후 이승만 대통령의 특명으로 보도연맹원 처형 지시를 무전으로 받았다고 한다. 강원도 횡성과 원주, 경북 영주에서 보도연맹원 처형의 현장집행자 역할을 수행했다고 증언했다. 대한민국 군경 중 보도연맹원 처형에 자신이 참여했다고 공개 증언한 첫 사례였던 것이다. 필자는 우여곡절 끝에 김만식 선생을 만나 6사단 헌병대의 보도연맹원 처형 사실을 듣고, 2차례의 공개증언을 주관했다. 공개증언 이후 국내 언론사뿐만 아니라 일본의 NHK, 영국의 BBC 등 세계적 유력 언론사의 인터뷰 요청이 쇄도했다. 인터뷰가 수개월간 진행되면서 김만식 선생은 힘들어했고, 과거의 전우(戰友)들로부터 싫은 소리를 들었다. 필자 역시 마음의 부담이 커지고 인터뷰 요청을 중간에서 커트하는 횟수가 늘었다. 그런데 김만식 선생이 다니던 성당의 신부님과 보도연맹원 유가족이 함께 한 식사자리에서 했다는 말은 나의 마음을 편하게 해 주었다. 김만식 선생은 신부님께 수십 년 간 마음의 부담이었고, 언젠가는 이야기해야지 했는데, 이번에 모든 걸 이야기 할 수 있어서 다행이다라고 했다 한다.

 

3. 유족 오성균의 트라우마

대성중학교에 우수한 성적으로 입학했던 오성균은 끝내 월사금(수업료)을 내지 못하고 학교를 중퇴했다. 작은 아버지가 여러 가지 핑계를 대며 월사금을 주지 않고, 툭하면 때렸기 때문이다. 그것이 평생에 한이 되었다. 이렇게 된 데에는 아버지가 19507월 초 후퇴하는 군경에 의해 처형되었기 때문이다. 이른바 보도연맹원이라는 이유로. 아버지를 잃은 한(), 친척으로부터 버림받은 한, 못 배운 것에 대한 한이 수십 년 간 가슴에 맺혔다. 그러다 과거사법이 제정되고, 청주청원지역에서 맨 처음으로 진실규명 신청서를 제출했다. 필자는 오성균씨를 200512월 초 영운동성당에서 만났다. 이후 지금까지 8년째 유족회 활동과 충북대책위원회 활동을 함께 하고 있다. 오성균씨는 누구보다 유족회 활동에 열심이고, 진실규명 결정문도 받았다. 민사소송을 통해 배보상도 목전(目前)에 있다. 하지만 행복해 보이지 않는다. 항상 불만에 차 있고, 의견이 다른 사람과 이야기하다 보면 목청을 높인다. 숨소리가 고르지 않다. 비단 오성균씨만이 아니다. 대부분의 유족들이 그렇다. 특히 제때에 진실규명신청서를 접수하지 못해, 배보상 재판에 참여하지 못한 유족들은 울분에 차 있다. 보상금을 받으면 마음이 편해질까? 의문이다. 그들의 상처는 여전히 치유되지 못하고 있다.

 

2002년 충북도내 16개 시민사회단체가 참여해 한국전쟁 민간인학살 진상규명 충북대책위원회(충북대책위)’를 꾸렸다. 10년이 지났다. 많은 사건이 밝혀지고 진실규명이 이루어졌다. 진실규명이 된 만큼 사건 관련자들의 행복지수가 높아졌는지 자문(自問)해 본다. 나는 행복한가? 역사의 트라우마는 쉽게 치유되지 않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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