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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일 오후. 별안간 추위로 얼어붙은 도시는 전쟁 준비가 한창이었다. 목요일까지는 베트남 북부도시 하노이의 축축하고 비릿한 겨울 날씨 같았다. 금요일부터는 또다시 냉랭한 공기가 콧등을 스치고 있었다. 거리에는 군용 야상처럼 두꺼운 옷을 입은 사람들이 털모자를 맞춰 쓰고 삼삼오오 나와 군화 아닌 장화를 신고 앉아 있었다. 그들 옆에는 적진을 향해 쏠 계획인지 머리는 허옇고 꼬리는 푸른, 짧은 탄도미사일체들이 쌓아올려져 있어 섬뜩한 분위기가 더해졌다. 어제까지는 평범한 사람들이었는데. 그때 화약처럼 빨간 가루를 가득 담은 비닐포대를 담은 차량이 도착했다. 누군가가 담배 한 개비를 끝까지 태우면 곧 화약이 터질 것 같았다. “엎드려!!” 소리와 함께 하얗고 푸른 미사일이 도시의 하늘을 가르는 장면을 그려본다. 금요일과 주말에 청주와 음성을 오가며 주택가와 식당가 곳곳에 “빨간장갑 부대원”들이 파마머리 소대장의 지휘아래 전쟁을 준비하는 모습이 보였다. 적어도 충북지역을 통솔하는 사령관의 지령이 있었는지 무기 공급이 분대 단위(최소전술단위)로 일사천리 진행되고 있었다.
어느 정도 짐작은 했지만 내 짝꿍의 어머니, 그러니까 한 달 전쯤에 결혼식을 올렸으니 사회적인 호칭으로는 ‘장모님’도 그 소대장(이하 용암동 소대장 또는 용암소대장) 중 한 명이었다. 군종병으로 이등병 생활을 나면서 느낀 점 중 하나는 무섭고 어렵고 중요하고… 이런 일들은 모두 내가 자는 동안에, 그러니까 어젯밤에 일어나있더라는 것이었다. 자고 일어나면 훈련 일정이 바뀌어져 있었고, 없었던 임시 지휘소가 연병장에 설치되어 있었고, 내가 그날 해야 할 임무가 정해져 있었다. 우리의 용암동 소대장도 이미 중요하고 어려운 일들을 어젯밤에 완수해놓은 상태였다. 탄약과 각종 내용물과 부자재들, 그것들을 담을 상자들 그리고 빨간 장갑까지 공수해놓았다.
이 새벽 나는 빨간 장갑을 끼는 순간부터 정식부대원으로 가입을 하게 된다. 마음이 잔뜩 비장해졌다. 그 이유는 다름 아니라 어젯밤 용암소대장이 나에게 조끼 한 장을 하사했기 때문이다. 고급실로 직접 손뜨개를 한 단단하고 따뜻한 잿빛 조끼였다. 이 조끼만 입으면 총칼을 맞아도 끄떡없을 것 같아 든든했다. 감동에 겨워하는 나에게 용암소대장은 태연히 작전 개시 시간을 일러주고 방으로 들어갔다. 개시 시간은 오전 5시에서 6시 사이였다. 부대일이라는 게 다 그런 것처럼 정시에 시작하는 일은 없지만 정시부터 몸과 마음의 준비는 하고 있어야 했다. 5시에 눈이 떠졌다. 짝꿍은 밤새 거꾸로 돌아 발바닥을 내게 보여주고 있었다. 잠이 깼다. 방문 너머로 인기척이 없는 걸 보니 잠시 기다려도 되는 모양이었다. 30분 쯤 선잠이 들었는데 바깥에서 소리가 들렸다. 작전이 시작되었다.
우린 비닐로 참호(塹壕)를 만들고 그곳에 밤새 점액질로 변한 화약가루와 각종 내용물을 쏟아부었다. 짝꿍의 동생(여기서는 부대원으로 통칭한다)은 미사일을 날라 참호 주위에 앉아 있는 나와 짝꿍에게 던져주는 역할을 했다. 부대원이 던져 준 미사일들을 하나씩 화약가루에 버무린 다음 상자에 옮겨 담는 게 나와 짝꿍의 임무였다. 부소대장으로 보이는 장인어른은 주방과 거실을 바쁘게 오가며 훈수를 두다가 그때그때 적절한 지원을 해주는 임무를 부여 받은 것으로 보였다. 작전은 2시간도 채 되지 않아 끝났다. 용암소대장의 격려와 함께 진수성찬이 차려졌다. 충! 성! 이로써 빨간장갑 부대원으로서의 첫 작전은 순조롭게 끝났다. 화약을 가득 머금은 푸른빛의 포탄들은 적진이 아니라 나의 모친의 집과 음성 숙소와 짝꿍과 내가 같이 살게 될 집으로 발사될 예정이다. 포탄이 도착하는 곳마다 기쁨이 터져 나오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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