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가의 창의적인 ‘정치감각’을 기대함
- 자크 랑시에르의 <감성의 분할> <미학 안의 불편함> <정치적인 것의 가장자리에서>
예술과 정치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아마도 인간에 대한 신뢰일 것이다. 왜 신뢰인가? 인간에 대한 신뢰란 곧 자기 자신에 대한 신뢰이기 때문이며, 바로 이 신뢰에 의하여 문학이든 정치든 가장 기본적인 윤리적 덕목을 생성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오랫동안 예술과 정치는 한데 묶여 수없이 거론되어 왔다. 거짓 정치를 미화하는 데 예술이 복무하고, 참 정치를 회복하는 데 예술이 참여해 왔기 때문이다. 나치예술이나 혁명예술이라는 신조어가 이를 증명한다.
오늘날 역시 예술과 정치는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1934년, 토마스 만은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정치적 사건에 대한 예술가의 자세는 완전히 해당 예술가의 개인적 방향성에 근거해 있다. 얼마나 작가가 사회주의나 파시즘, 자본주의와의 투쟁에 감화되고 있는가? 이 투쟁은 내적 지향성을 지니고 있고 내적 사물에 관해 저술하는 작가에게 그리 강력한 영향을 미치지는 못할 것이다.”(「문학과 히틀러」)
토마스 만은 정치의 힘을 간과할 것일까. 토마스 만의 주장과는 달리 여러 예술가들은 ‘예술집단’을 결성하고, 파시즘과 자본주의 또는 [반대로] 민주주의와 사회주의 등에 맞서 집단적으로 투쟁해 온 것을 보면, 예술가들이 온전히 ‘개인적 방향성’에 근거해서만 살아왔다고 볼 수만은 없겠다. 더욱이 최근 몇년간 지속되고 있는, 예술과 정치에 관한 일련의 문제제기와 이에 따른 여러 논의의 전개과정은 몇몇 중요한 진실을 은폐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 혐의는 더욱 분명하다.
단적으로, 예술과 정치의 관계모색에 관한 최근의 논의는 예술 또는 예술가를 둘러싼 사회적 관계와 생산⋅소비⋅유통이라는 경제적 관계를 은폐하고 있다. “오늘날 예술은 정치적 감각을 잃어버렸다”는 몇몇 작가들의 탄식은 그 순진함에도 불구하고, 우후죽순 격으로 이어진 몇몇 예술가와 비평가들의 동조에 의해 이제는 더 이상 순진하다고 여길 수 없을 정도로 오염되어 버렸다. 오늘의 예술에 관한 탄식의 배후에는 경제적 이해관계를 둘러싼 쟁투가 깔려 있다.
‘예술과 정치의 관계’는 가장 높은 위계의 관계설정이며 예술가라면 누구도 제외될 수 없는 성격을 지녔다. 이에 우리와는 전혀 다른 사회적 맥락에 있는 프랑스의 정치사상가 자크 랑시에르의 발언을 몇몇 인사들이 오늘의 한국예술계에 ‘오독’으로 번안함으로써 특별한 정치적 효과를 만들어 냈다. 그렇지만 지금의 우리 예술계의 처지에서는 ‘예술과 정치’가 아닌, ‘예술과 사회’ 또는 ‘예술과 경제’라는 관계를 논의하는 것이야말로 ‘정치적으로’ 더욱 올바른 문제 설정이다.
‘예술과 사회의 관계’라는 논의는 다시 종교와 예술, 교육과 예술, 일상과 예술, 지역과 예술이라는 세부주제로 확산되어야 하고, ‘예술과 경제의 관계’ 또한 예술과 소비, 예술과 생산, 예술과 유통이라는 주제로 확산되고, 토론되고, 탐구되어야 한다. 더 세분화된다는 것은 추상에서 구체로 나아가는 것이다. 오늘날 한국예술의 전진과 퇴행이 구체적인 개별자들, 나 그리고 너 자신의 문제로 상승되어야만, 그제서야 ‘예술과 정치’의 관계는 제대로 논의될 수 있다.
사회⋅경제적 이해관계를 은폐한 채 ‘정치적 감각’의 상실을 운운하는 태도는, 랑시에르의 말에 따르면 ‘치안의 논리’에 다름 아니다. “공동체를 그들의 자리, 점유, 그리고 이 자리와 직무에 부합하는 존재방식에 따라 정의되는 안정된 집단들의 집합으로 보는 시각을 나는 치안의 논리(la logique policiere)라고 정의한 바 있다. 치안의 논리에서는 전체가 부분들의 총합과 동일해지며, 각 부분이 그에 부합하는 몫을 갖는다. 또한 치안 논리에서는 전체에 바깥이 없고, 실재가 외양과 명확히 구분되며, 가시적인 것이 비가시적인 것과 명확히 구분되고, 말이 소음과 명확히 구분된다.”(「미학적 전복」)
거짓 정치를 미학화하는 일에 여념이 없는 예술가들은 논의 대상에서 배제하더라도, 참 정치를 회복하려 애쓰는 예술가들이 이렇게 ‘치안의 논리’로 무장되어 있음을 목격하는 일은 몹시 씁쓸하다. 제도와 자본의 힘이 예술을 실질적으로 포획하고 있다는 증거다. 하지만 정부의 예술가 지원시스템과 보조지원금, 거대 자본에 의한 예술인력 양성시스템 등에 포괄되어 있더라도, 그 포괄을 ‘형식화’하고 다시 ‘무력화’하는 예술가의 창의적인 ‘정치’감각을 논의해야 하는 것 아닌가?
랑시에르가 말하는 ‘정치’는 바로 그것이다. “정치의 논리(la logique politique)는 부분들, 자리들 그리고 직무들의 [치안적] 셈에 포함되지 않았던 보충적 요소의 도입으로 정의된다. 정치의 논리는 자리들의 나눔을 흐트러뜨리는 동시에 전체의 셈 그리고 가시적인 것과 비가시적인 것의 나눔을 흐트러뜨린다. 정치의 논리는 욕구들[이 지배하는] 어두운 삶에만 속해 있는 것으로 셈해지던 자들을 말하고 생각하는 존재들로서 가시적으로 만든다. 정치의 논리는 어두운 삶[에서 새어나오는] 소음으로밖에 지각되지 않았던 것을 담론으로서 들리게 만든다. 바로 이것이 내가 ‘몫 없는 것들의 몫’ 또는 ‘셈해지지 않은 것들을 셈하기’라고 불렀던 것들이다.”(앞의 글)
그러므로 예술과 정치는 대등한 관계에 있다. 지금은 예술과 사회, 예술과 경제의 관계를 구체적으로 탐색할 때이다. 사회 ⋅경제적 관계를 배제한 ‘예술과 정치’라는 관계 설정은 다시 종속의 길을 선택하는 것이다.
_ 소종민(공부모임 책과글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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