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해 장애인자립생활센터에서 권익옹호 캠페인을 하러 성안길 롯데시네마에 갔을 때였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세계 에이즈의 날을 맞이해서 에이즈 예방 행사와 캠페인도 옆에서 크게 진행하고 있었다.
자리를 잡은 뒤 조금 지나 한 할아버지가 박스와 폐지들을 수거하시며 주로 에이즈예방 캠페인을 나온 사람들을 대상으로 “빨리 가!”를 외치셨다. 처음에는 멀리서 본인의 일을 하시며 “빨리 가”라고 했었다. 분명 불편한 마음이 치솟았지만 그저 조금 불편할 뿐이었다. 하지만 옆에 행사가 마무리 되면서 캠페인 테이블에 젊은 여성분들만 자리 잡고 있을 때부터였다. 할아버지의 거리가 점점 가까워지며 “빨리 가”라는 목소리도 점점 커졌다. 남성들이 주변에 있을 때는 자리를 떠났다가 여성들만 남았을 때 돌아와 “이게 뭐하는 거냐? 빨리 가!”라는 소리를 반복하며 질렀고 캠페인을 진행하고 있는 책상까지 쳐댔다. 나도 모르게 “자꾸 그러시면 경찰을 부를 거에요!”라고 외쳤더니 경찰 부르라고 하면서 우리 쪽으로 와 과거의 경찰증을 보여 주며 자기가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지를 토로했다. 그리고 그때부터 캠페인을 진행하는 양쪽에 대고 위협적인 목소리로 “빨리 가”를 외쳤다. 여차하면 경찰에 신고하려 핸드폰을 만지작거리고 있던 차에 거리를 지나가고 있던 것으로 보이는 젊은 두 남성이 할아버지를 에워쌌다. 물리적 폭력이 없었고 큰 소리가 나지는 않았지만 분위기와 얼핏 들리는 말을 들었을 때 거친 언어들이 오고 갔던 걸로 추정된다. 잠시 버티던 할아버지는 젊은 두 남성의 기에 팍 눌린 채 작은 목소리로 “빨리 가요”를 우리 앞에서 되뇌며 떠나셨다.
할아버지를 보며 내가 들었던 감정은 처음에는 분노를 넘어선 혐오와 유사한 감정이었다. 나이 들어서 보이는 보고 싶지 않은 모습에 참을 수 없는 거북함이 밀려왔다. 처음에는 나도 욕설과 고성을 내지르며 대응해 보고도 싶었다. 하지만 경찰을 부르겠다는 말을 한 이후 할아버지의 모습은 아예 피해 버리거나 경찰을 불러서 돌려보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곧이어 실랑이 끝에 물러나며 “빨리 가요”라는 말을 남기고 떠나는 할아버지의 슬픈 눈과 마주쳤을 때에는 알 수 없는 씁쓸함이 밀려왔다. 결국 할아버지 또한 약자이면서 자신보다 외형적으로 약해 보이는 자들을 골라 자신의 화를 해소시키려는 모습이 화가 나면서도 안타까웠다.
그리고 집에 돌아온 후 그 할아버지의 모습을 떠올리니 소용이 있든. 없든 “왜 우리보고 빨리 가라고 한 건지...”, “무엇이 할아버지를 이토록 화나게 만들었는지...” 한 번쯤 차분하게 물어보면 어땠을까 하는 뒤늦은 후회가 밀려왔다. “빨리 가”에서 “빨리 가요”까지의 거리에 진짜 필요했던 건 자신보다 더 큰 힘이 아닌 “안녕”을 물어봐 주는 따뜻한 말 한 마디였는지도 모른다.
물론 혐오와 약자에 대한 공격적 행위들을 막기 위해서는 여러 가지 법과 제도의 개선(포괄적 차별금지법 제정 등)이 반드시 필요하다. 하지만 법과 제도는 사회적 약자들의 권리를 보호하기 위한 최소한의 안전장치 이상의 기능을 하긴 어렵다. 따라서 법과 동시에 사람들의 인식과 태도의 변화가 필요하다. 더 근본적으로는 사람들의 마음의 변화가 있어야 할 것 같다. 개인적으로 사회적 약자들에게 혐오의 감정을 품고 있는 많은 사람들은 (그 감정을 이용하는 자들과 별개로) 사회적 단절과 감정의 고립을 겪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한다. 결국 사람 사이에 따뜻한 감정의 물길이 흘렀을 때 혐오의 불길이 더 이상 퍼지는 걸 막아낼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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