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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식지/살며 사랑하며

<112호> 규정되지 않는 사회적 약자들을 위하여_서재욱(청주복지재단 연구위원)

by 사람이 되어 숨을 쉬었다. 2021. 8. 30.

 

몇 년 전 지역에서 아동복지시설의 느린학습자 지원방안에 대한 연구를 수행한 적이 있었다. 느린학습자를 지칭하는 용어로 정신의학에서는 “경계선지능”이라는 표현을 쓰고 있다. 경계선지능은 ‘지능지수가 71-84 사이에 해당하며 적응능력에 일부 손상이 있는 상태’를 말하는데, 과거 ‘정신질환진단및통계편람’제1판(DSM-Ⅰ)에서는 ‘경도정신박약’으로 분류되었고, 제2판(DSM-Ⅱ)에서는 ‘경계선정신지체’로 분류되었으나 제3판(DSM-Ⅲ)부터는 ‘정신질환에 속하지 않지만 관심이나 치료의 초점이 되는 조건’으로 정의되면서 장애 범주에서 제외되었다. 경계선지능 인구가 가정과 사회로부터 적절한 지원을 제공받을 때 대부분 뚜렷한 적응능력의 손상을 보이지 않는다는 판단에 의거한 것이었다.

 

그러나 과연 느린학습자들이 사회로부터 적절한 지원을 받았는지에 대해 묻는다면 그렇지 않았다고 답할 수 있다. 누군가 정부가 정의하는 장애인 또는 기초생활수급자에 해당하면 지원을 받을 수 있고 관심의 대상이 된다. 그러나 그렇지 않으면, 일선 담당자가 아무리 좋은 의지를 가지고 있어도 도울 수 있는 게 거의 없는 게 현실이다. 올해 초 방영된 SBS <그것이 알고 싶다>의 ‘단칸방의 유령들’에서 아동복지시설에서 퇴소한 느린 학습자인 20대 딸이 정신질환을 가진 어머니와 함께 살다가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하는 사건이 다루어진 적이 있는데, 장애인으로 분류되지 않았기 때문에 관심의 대상도 되지 못 하였다. 또한 같은 회차에서 장애인으로 진단을 받지 않아 아무런 지원을 받지 못한 ‘방배동 모자’ 사건도 다루어졌는데, 같은 맥락에서 바라볼 수 있다. 무언가로 규정되지 않은 사람은 행정의 관심을 받지 못하는 것이다.

 

정부 행정에서 지원의 대상을 명확하게 규정하는 것은 당연히 필요한 일이며, 그러한 규정 없이 거대한 제도가 작동되는 것이 불가능하리라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누군가를 장애인, 실업자, 빈곤층 등 무언가로 규정하는 것은 또한 불가피하게 그 ‘경계선’에 서 있는 사람들을 발생시킬 수 있으며, 애매모호한 위치에 있는 이들을 어떻게 포용하느냐가 반드시 고려되어야 한다.

 

예를 들어, 느린학습자들은 경쟁과 효율을 최상의 가치로 여기는 사회 분위기 속에서 ‘뒤쳐진’ 사람으로 취급된다. 느린학습자를 포괄적으로 이해하면 다른 나라에서 이주해서 한국말이 서툴거나, 어린 시절부터 책읽기가 습관화되지 않았거나, 난독증이 있거나, 하루 종일 힘든 일에 시달리는 사람들 모두 어느 순간 ‘느린학습자’가 될 수 있다. 그러나 과연 우리가 접하는 정보와 매체들이 이들을 얼마나 배려하고 있는지를 생각하면 개선되어야 할 점이 많다고 밖에 할 수 없다. 이른바 ‘빠른’ 사람보다도 ‘느린’ 사람을 얼마나 배려하느냐가 복지국가의 척도이다. 버스가 조금 느리게 가더라도 교통약자를 먼저 배려하는 문화가 자리잡은 곳이 복지국가이다. 규정되지 않는 사회적 약자들을 위해서도 도움이 필요한 곳에 대책이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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