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보다 먼저 이 땅에 발 디딘 아파트에 살고 있다. 오르막길에 자리 잡은 5층짜리의 낮은 건물이다. 처음 들어올 때는 정말이지 대궐 같았다. 15평쯤 되는 방 두 개짜리 집은 리모델링까지 마쳐 허술한 외관과 달리 깔끔해 보였다. 독립한 이후 거실이 따로 있는 집에 사는 것도 처음이었지만 방이 두 개나 되니 도대체 두 공간을 어떻게 활용해야 할지 생각만 해도 가슴이 벅찼다. 가격도 덩치도 분에 넘치는 6인용 원목 테이블을 사다 큰 방에 넣고 친구들과 둘러앉아 새벽까지 수다를 떨었더랬다.
낡은 건물에서 하자는 피할 수 없었다. 싱크대 수전이야 소모품이니 부품을 사다가 직접 갈면 그뿐이었는데, 작년 여름에는 윗집 누수로 화장실 천장에서 물이 흐르고 주방과 침실 벽은 옴팡 젖었다. 젖은 벽지에서는 곰팡이가 피어올랐는데 청록색 자국들은 금방이라도 집 전체를 집어삼킬 듯 맹렬히 면적을 넓혀갔다. 최근에는 거실의 LED 전등도 고장이 나고, 수도에서는 녹물까지 나오고 있다. 오래 살 집은 못 된다는 생각이 든다.
다행히 내년 5월이면 지금 살고 있는 집의 2년 계약 기간이 만료된다. 아직 말미가 조금 남았지만 시간에 쫓기긴 싫다. 얼마 전부터 틈틈이 인터넷상에서 매물을 들여다보고 있는데 보고 있자니 과연 무사히 이사를 나갈 수 있을지 점점 자신이 없어진다. 전세금 시세가 올라도 너무 올랐다.
얼마 전 정부가 다주택자 취득세 중과 대상에서 공시가격 1억 원 이하 주택을 예외로 둔 이후 소형 평수 전세가 수천씩 올랐다. 단타 갭투자를 노린 투자자들이 저가 아파트에 몰리면서 덩달아 전세가까지 오른 모양이다. ‘청주 투룸 전세’를 검색해 보면 투기를 앞두고 현장답사를 나오는 임장 행렬만 수십, 수백 페이지가 뜬다. 청주 시내 1억 이하의 집을 모두 외지 투기 세력이 싹쓸이했다는 기사도 볼 수 있다. 이사 가고 싶어서 봐둔 우리 집 바로 뒤의 주공 아파트는 ‘소액 투자의 성지’라 불리고 있었다.
주말 투자 지역으로 청주가 ‘핫’하다며 내가 사는 아파트의 부동산 가치를 후하게 평가하는 블로그 글을 본다. 핫한 동네에 사는 덕분에 우리 집은 1년 반 만에 2천만 원이 올랐고 그 틈에 기존 주인은 집을 팔았다. 새로운 주인이 생겼다는 통보를 문자로 받았는데 그가 누군지 얼굴도 이름도 연락처도 나는 모른다.
친구와 함께 강아지 산책을 시키면서 집 근처 대학 캠퍼스의 가장 높은 곳에 올랐다. 우리 집 바로 건너편 야산이 중장비로 파헤쳐 져 속살이 훤히 드러났다. 주거 단지를 짓고 있다고 했다. 저기에는 내 자리가 있으려나. 아마 신축이라 더 비싸겠지?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니 온천지가 아파트와 주택인데 내 몫은 하나도 없으니 속이 허하다.
'소식지 > 마음거울' 카테고리의 다른 글
<117호> 무해한 덕질을 꿈꾸며_ 계희수(충북민주언론시민연합 활동가) (0) | 2022.01.26 |
---|---|
<116호> 반성합니다_충북민주언론시민연합 계희수 활동가 (0) | 2022.01.06 |
<114호> 친구의 이혼_충북민주언론시민연합 활동가 계희수 (0) | 2021.10.26 |
<113호> 지방방송의 볼륨을 높이자_계희수(충북민주언론시민연합 활동가) (0) | 2021.09.30 |
<112호> 병원 투어_계희수(충북민주언론시민연합 활동가) (0) | 2021.08.30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