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고등학교 친구들을 만났다. 여덟 명 정도가 우르르 떼로 몰려다니던 때의 추억을 떠올리면 밤을 새도 모자랄 만큼이다. 그 중 둘은 결혼을 하고 아이를 키우고 있다. 오랜만에 딸을 키우는 A의 집에 모였는데 아기만 있고 남편은 없었다. A의 남편도 우리와 곧잘 어울리는 사람이었던 터라 안부가 궁금했다. 남편은 어디 갔냐고 빨래를 널고 있는 A에게 물었더니 친구가 어색하게 웃었다. ‘무슨 일이 있구나’, 묘한 분위기가 감지돼 더 말을 보태지 않았다.
밥을 먹고 3살짜리 딸아이와 한창 놀아주던 우리에게 A가 말했다. “나 오빠랑 이혼할 거 같아. 별거한지 두 달 됐어.” 우리는 크게 놀랐지만, 마치 짠 것 마냥 차분한 반응을 보였다. 별 문제 없어 보였던 친구의 겉과 달리, 마음고생이 심했던 모양이다. 친구의 이야기를 가만히 들었다.
A는 큰 회사의 10년차 직원이다. 어릴 때부터 자기 밥벌이를 똘똘하게 잘하고 결혼하고 나서도 성실히 회사에 다니던 씩씩한 기질의 아이다. A의 남편은 결혼 전부터 영업일을 했다. 그러나 회사의 실적 강요가 너무 심해 결혼하고 얼마 안 가 퇴직하고 기술을 배웠다. 새로운 분야에 도전하는 A 남편 모습에 응원을 하던 참이었는데, 알고 보니 그는 본인이 육체노동을 해 힘들다는 이유로 집안일과 육아를 전부 A에게 전가하고 있었다. 어린아이를 혼자 키우며 회사 다니는 것도 괴로운데, 남편 수발까지 들어야 하는 형편이 친구로서는 감당하기 힘들었던 거다. A는 차라리 남편이 없는 쪽이 육체적·정신적으로 더 편하다고 말했다.
A는 남편의 태도가 자신을 더 고달프게 만들었다고 털어놨다. 여러 차례 문제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 달래보고 화도 냈지만, “주변 사람들 중 내가 제일 잘 하는 남편”이라며 적반하장 식의 태도를 보였다고 한다. A 남편 친구들로 말하자면, 지금까지도 “돈 몇 푼이나 번다고 여자가 밖에 나가서 일을 하느냐”는 멘트를 시전 하는 가부장적인 사람들이다. A는 쉬는 날도 아이와 눈 맞춤 한번 안 하는 남편의 행동을 보고 마음이 싸늘하게 식었다고 한다. 연애할 때 A에게 정성을 쏟던 남자의 모습은 온 데 간 데 없었다.
A의 이야기를 듣는데, 엄마의 삶이 떠올랐다. 엄마가 자식 셋을 키우는 동안 아빠는 양말 한 짝 신기는 일도 거들어본 적이 없다고 한다. 다행히도 아빠는 그 와중에 아이들과 놀아주는 일은 잘했단다. 적어도 애들은 끔찍이 여기는 점 때문에 가부장적인 아빠를 견뎌왔노라고 엄마는 이따금씩 젊은 날을 회상했다. 손 하나 까딱 안 하는 남자들은 다 옛날 얘긴 줄만 알았는데‥. 이혼을 말리기도, 선뜻 응원하기도 힘든 나와 친구들은 말을 아낄 수밖에 없었다.
세상이 변해서 여자가 살기 편해졌다는데, 절대적 기준에서 그렇게 보일 수도 있지만 상대적으로 보면 틀린 말이다. 요새 남자들이 변했다고 하지만, 그 사이 여자들의 의식수준도 훌쩍 높아졌다. 그 때문에 결혼한 부부 사이에 발생하는 간극은 예나 지금이나 비슷하다. 특히 젊은 여성들이 느끼는 시댁과 가정 내 가부장 문화는 우리들을 결혼 제도 밖으로 내쫓는다.
A의 딸에게 보내줄 동화책을 고르며 생각한다. A가 이혼을 한다면 친구로서 어떻게 행동하는 게 좋은 방향일까. 친구로서 A를 적극적으로 지지하고, 친구가 현실에서 느끼는 어려움을 함께 고민해주면 될 것 같다. 모쪼록 너무나 귀여운 A의 딸도 자신의 엄마처럼 씩씩한 사람으로 자라면 좋겠다. A에게는 든든한 친구가, A의 딸에게는 친구 같은 이모가 되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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