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 것 아닌.
잔디
친구와 세상을, 일상을 살며 깨달은 사소한 부분들을 신나서 이야기하다 보면 그의 경험과 나의 현실이 맞닿아 있어 더 신나고, 친구가 스스로를 깊이 사랑하며, 참사랑으로 자신을 보듬는 모습에 눈물이 나기도 하고, 내가 뭐라고 나에게 그 귀한 경험을 들려주나 내가 들을 자격이 있나 싶기도 하다가, 그 사랑의 본질을 알아듣는 내가 기특하고 친구의 깨달음에 공명한다는 사실이 기쁘고, 편안하여서 울컥 눈물이 나기도 한다.
헌데, 거기까지인 날이 있다. 아니, 허다하다. 그저 거기까지여서 뒤돌아보면, 현실은 늘 그렇다. 다 먹고 난 빈 요구르트병은 책상 위 모니터 앞에서 나를 쳐다보고 있고, 이 집엔 물컵 하나 설거지하는 사람이 없으며, 아이는 일주일 전에 약속한 오늘 함께 하기로 한 일정에 대해 빈정거리듯 “어.”라고 대답하고 일어날 생각을 하지 않으며, 다시 청하면 또, “어.”라고 대답하고 같은 자세로 거기 그 자리에 있다. 그래, 깨닫는다 해도 현실은 바뀌지 않지. 요구르트병은 내가 지금 치우고 싶은 사람이니까 헹구어 분리수거 봉지에 골인시켰다. 설거지도 다음 끼니 준비할 때에 씽크대가 비어있으면 내가 홀가분하니 말끔해지는 그릇에 집중하며 설거지도 끝냈다. 아이의 첫 번째 “어.”까지도 잘 넘겼다. 그런데, 두 번째 들려오는 “어.”에 걸려 넘어졌다. 아이고. 깨달음이고 공명이고 뭐고 다 어디로 가고, 나는 지금 당장 저 아이에게 가르쳐야 한다. 함께 하기로 한 일정을 취소하려면 그것에 합당한 이유를 나에게 200자 이상의 문장으로 설명하고, 갑작스레 변경하게 된 것에 대해 얼마나 당황스럽냐, 실망스럽냐 라고 말하여 나를 공감하여야 한다는 소리가 들려온다. 그리고 이런 식은 아니지, 내가 함께 가려고 얼마나 공을 들였는데 너는 그 과정과 나의 노력을 인정해야 한다 다다다다다... 이런 생각들이 영점일초도 안 되는 사이에 설악산 울산바위의 크기로 나에게 굴러 왔고, 나는 이 울산바위에 줄을 묶어 질질 끌고 아이에게 다가가 얼른 똑바로 앉으라는 말을 시작으로 지독하고 파괴적인 싸움을 시작한다. 지금 뭐라고 말했냐 부터 시작하여 눈을 엄청 커다랗고 독하게 뜨고는, 너는 정확한 이유를 설명해야 한다고 말한다. 아이는 이에 저항하며, “그냥.”이라고 말하고 이쯤에서 어디서 나왔는지도 모르는 파리채가 손에 쥐어져 있고, 내 목소리는 이미 이장님이 방송하는 마을 스피커보다 더 커져 집안은 온통 내 목소리로 채워져 있고, 파리채는 파리도 없는 바닥을 두드리며 말도 안 되는 논리로 나는 옳고 너는 틀리며, 그래서 너는 아까 이렇게 말해야 했고... 이쯤 되면 아이는 반박하던 말을 하지 못하고 눈은 빨갛고 눈물은 그렁그렁, 한 명 두 명 문을 열었다 닫았다 말릴까 말까 하며 큰 녀석들이 왔다 갔다 한다. 문을 닫으라고 말하고 싸움은 계속된다. 헌데, 내 뒤통수에서는 쯧쯧 혀를 차는 내가 나를 바라보며, 다시 쯧쯧 알면서... 알잖아... 속삭이는 목소리가 들린다. 파리채를 찾으러 갈 때부터 벌써 알고 있었다. 아니, 아이에게 똑바로 앉으라고 말할 때부터 알고 있었지. 내가 말하는 모든 문장의 주어는 ‘나’이어야 했고, 대화에 성공하려면 아이의 말을 먼저 ‘온유’한 상태로 들으려 했어야 했으며, 내가 갖고 있는 오늘 일정에 대한 정보와 아이가 갖고 있는 정보가 동일한 지 확인하여야 했고... 등등등의 소리가 들린다. 아, 정신을 차린다. 그리고 연이어 내가 하고 싶은 것이 이런 것이었던가 라는 생각이 따라온다. 나는 나를 가볍고 편안하고 안전하게 놓아두고 싶었는데 어찌하여 다시 불안하고 두렵고 힘든 자리에 나를 가져다 놓고, 내 앞에 있는 아이까지 두렵고 아프고 눈물 나는 자리에 앉혔는가... 마치 어린 날의 나처럼... 난데없이 말의 소나기를 맞으며 어디로 피하지도 못하고, 그 소나기가 그치기만을 기다렸던 슬프고 어린 나처럼...나는 어찌 이것을 되풀이하고 있는가? 갑자기 쏟아진 소나기에 무섭고 억울했을 아이에게 사과를 한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지경에 빠져 답답하고 어찌할 바를 몰라 마음이 꽉 막혀 울음소리조차 내지 못한 마음을 공감한다. 이때쯤 아이는 나에게로 와 안겨 막혔던 울음을 엉엉 운다. 아이를 무릎 위에 앉히고, 꼭 끌어안고 등을 쓰다듬는다. 울음이 잦아들 때까지. 아이가 하는 말을 듣는다.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몰라 두렵고, 이쪽으로도 저쪽으로도 갈 수 없었던 갑갑함을 다시 공감한다. 아이는 오늘 약속했던 일정을 취소하고 싶었던 이유를 말한다. 나는 그제서야 아이와 내가 갖고 있었던 정보가 달랐다는 것을 안다. 한 가지 일에 대해 다르게 해석하거나 다르게 기억하는 부분에 대해 그 차이가 있을 수 있음을 여기고, 같은 포인트에서 이야기를 시작했어야 함을 이제야 다시, 기억해 내고 다시 사과하고, 오늘 우리의 갈등이 일어난 이유와 오늘의 배움을 공유하고, 다시 일정을 조율한다. 단 세 문장으로 요약할 수 있는 긴 이야기를 나는 그날 촉박한 마음으로, 인정받지 못한 ‘화’를 가득 안고, 한 삼십분을 떠들어댔었다. 아이고, 돼다. 돼.
깨달음의 자리는 저 높은 계단 위에 고귀하게 있어서 깨닫게 되면 나의 안색도 바뀌고, 자리도 바뀌고, 언어도 바뀌고 완전 변태한 번데기처럼 나도 나비가 되는 줄 알았다. 그런데 아니다. 자주 헛갈리고, 길을 잃는 것은 여전하며, 알아차릴 때도 있지만, 그 마음이 한순간에 무너져 열 개 쌓아놓은 아름다운 탑이 열 한 개째에 모양도 없이 무너져 버리기도 한다. 그런데 그 자리에 흔적이 남아서 길을 잃었던 마음이 지나간 자리가 보이고, 밖에서는 볼 수 없을지라도 나에게는 보이는 그런 흔적들이 있다. 또 알 수도 없이 어느새인가 내 마음에 들어와 작은 실수라도 하면 실수했다고 빈정거리는 생각이 태반이었다고 하면, 이젠 실수할 수 있지 실수할 수 있어 실수하면서 배우는 거야 다시 배우는 마음을 일으키자고 나의 손을 자주 잡아주기도 한다. 빨갛게 타들어가기만 하던 마음에 산들바람이 불어, 따뜻한 차 한 잔만으로는 위로가 되지 않던, 가벼움을 선사한다. 친구의 말처럼 나는 나를 가볍고 편안하고 자연스러운 자리에 그런 상태로 놓아두고 싶다. 내가 그렇게 있는 것에 동의한다. 나를 그렇게 사랑하고 싶다. 참사랑 그 자체이고 싶다. 내가 오랫동안 그리워하던 그 사랑 덩어리이고 싶다. 그냥 그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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