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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식지/산 위에서 부는 바람

<126호> 비와 거미줄

by 인권연대 숨 2022. 10. 27.

비와 거미줄

 

무작정 애쓰며 사는 것이 목표이던 때가 있었다. 그것은 나를 사랑하는 방식이기보다 나를 억누르는 방식이어서 어제도 슬펐고, 오늘도 슬프고, 내일도 슬플 예정의 흐름이었다는 걸 긴 시간 공부하면서도 알 수 없었다면, 2년 사이, 겉으로만 하던 공부를 (물론, 이렇게만 말하기 어려운 시간들이지만) 더 깊이 하게 된 이후, 이곳저곳에서 다시, 자기 사랑하는 공부를 하고 있는 시절인연이 내 주위에 응집하고 있다는 걸 느낀다. 그간에도 그 인연들은 나를 돕고 있었겠지만, 이제 그 인연을 알아보고 그 인연들 사이에서 공부하고 알아듣고, 일상에서 그것을 살아보고 넘어지고, 다시 그 구덩이에서 빠져나오며 다시 사는, 내가 좋다. 그걸 내가 볼 수 있어 좋다.

 

다섯 번의 선교사님들과의 피정을 마쳤다. 물론 올해 만남의 마무리이고, 우리는 계속 만나 같이 상처를 치유하고, 예수 말씀을 묵상하고 묵상 내용을 공유하며 서로의 눈물을 보아줄 것이다. 같이 있든, 같이 있지 않든. 마무리가 끝은 아니라고 누군가 말하는 소리가 좋았다. 그간 내 안의 상처를 바라보기 위해 한 그루의 나무에 나의 상처를 써 붙여서 상처 많은 나무를 바라보며 작업했다면, 마무리 피정에서는 건강한 빈 나무와 나무 주변에 꽃, 나비, , 열매, 나뭇잎, , 뿌리, 줄기, 가지, 거미줄 등 여러 가지 요소를 그리며, 어떤 의미로 그 요소를 그렸는지 나무를 꾸몄는지, 어떤 마음으로 꽃을 그렸는지, 꽃을 그리지 않았는지 내 의도를 살피며 활동하였다. 활동한 후에는 내보일 수 있는 데까지 내보이며 나무 그림 한 장을 가지고, 자신의 변화 혹은 현재 상태를 여러 사람이 이야기하였다. 이야기 듣는 동안 여러 달에 걸쳐 두 달에 한 번씩 만난 사람들의 과거의 시간, 근래의 시간이 느껴졌다. 그 시간을 살아온 사람들의 애씀이, 정성이 보였다. 안으로만 목소리를 생성하다가 밖으로 말을 내게 된 사람이 내가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게 되었는지 모르겠다며 울었고, 어떤 이는 자신은 아직 꽃이 될 수 없는 존재이기에 꽃을 그리지 않으려고 했지만, 그래도 꽃이 되고 싶은 마음이 있기에 활짝 피어난 꽃 한 포기를 그리며 마음이 찡했다고 말했고, 치료사로 살며 이십 년 넘게 작업을 해왔지만 길을 잃은 것처럼 공허했다며 이제 자신을 바라보기 시작한 것 같다고 그 자체만으로 감사하고, 그래서 이 삶을 어제까지는 살고 싶지 않았으나, 오늘부터는 다시 살아보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며 조용히 미소 지으며 울었다. 그 사람들과 둥그렇게 앉아 그 속에 있는 나는, 울지 않았다. 우는 사람에게 휴지를 가져다주려고 일어나지도 않았으며, 그저 자신을 말하고 있는 사람을 가만히 들여다보거나 가만히 그를 느끼려고 그의 이야기를 들으려고 가만히, 있었다. 예전의 나는 그와 같이 너무 펑펑 울거나 그의 이야기에 내 이야기를 섞어 그의 이야기를 듣다가 내 이야기로 넘어가 그를 해석하거나, 나를 해석하거나 하며, 그곳에 있지만 있지 않은 사람으로 앉아 있었을 텐데, 나는 그곳에 그저, 있었다.

 

나무 그림 작업하는 동안 주의 깊게 보고 들은 것은 라는 단어와 나중에 무릎을 탁 친 단어는 거미줄’. 설명 들을 때, ‘라는 단어를 그저 단비로 인식하기보다, 혼자 걷는 길 위에서 우산도 없이 갑자기 맞는 비라든지, 오랫동안 내린 지루하고 지겨운 장맛비라든지, 가을에 수확하는 시기에 내리는 쓸데없는 비로 해석했다. 그런데 가만히 살펴보니, 비는 땅에 내려서 땅을 부드럽게 적셔주고, 생명이 자라는 데 있어서 꼭 필요한 요소라는 걸 내가 간과하고 있었다는 것을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보았다. 내가 한 가지 해석을 가지고 를 바라보고 있었구나 하며, 아이고 공부해도 소용없어 아직도 여전히 이러고 있구나, 라고 생각하다 다시, 고개를 흔들고 현재로 돌아왔다. 한 가지 해석을 가지고 삶을 바라보며 살아내느라 얼마나 힘들었겠어. 딱 거기에서 멈추고 양손으로 나를 감싸고 안아주며 나를 토닥토닥하면 되는 것을... 그 외로움과 슬픔 속에 서 있었던 서글픈 나를 내가 안아주면 그만이다. 네가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었으니, 너도 힘들었지만, 네 주위 사람들도 얼마나 힘들었겠니, 부터 시작해서 다양하게 올라오는 자기 비난은 이제 그만~! 그거 많이 했다. 고마 해도 돼. 그리고, ‘거미줄’. 거미줄은 활동지의 단어 목록에서 읽으면서도 휙 지나갔는데 활동을 준비한 선교사님 두 분이 사람들에게 제시할 단어를 써내려가며 고민하다가 함께 추가한 단어라고 이야기를 들으며, 다시 보니 나뭇잎 바로 옆에 당당히 거미줄이 쓰여 있었다. 아이고, 거미줄이시여~! 아침마다 빨래를 널 때마다 날마다 빨랫줄을 턴다. 나란히 늘어져 있는 세 가닥의 얇은 빨랫줄과 빨랫줄 사이에 쳐져 있는 거미줄과 그 줄에 가만히 서 있는 거미. 그걸 털어내고 빨래를 넌다. 햇빛의 각도나 내 시선의 각도에 따라 보이기도 하고 보이지 않기도 하여서, 의식하지 못하면 얼굴에 목에 턱 걸려버리는 거미줄. 거미줄에 걸려있는 잠자리의 날개, 거미줄로 칭칭 감겨 거미줄에 걸려있는 곤충, 거미줄에 붙어있는 민들레 씨앗 하나, 나뭇잎 한 장. 이런 걸 가만히 들여다 보거나 쪼그리고 앉아 보고 있다 보면, 내 마음속의 거미줄은 무엇일까?(어떤 의미로 쳐져 있을까?) 거미줄에 무엇이 걸려있을까? 생각하곤 했는데... 목록에서거미줄을 놓치다니...아쉽다. 보고 싶은 대로 보는 것도 하지만, 보고 싶은 것만 보는 것도 여전하여서. 구덩이에 다시 빠짐. 이것이 지금 나의 거미줄의 상태인가 싶기도 하다. 거미줄은 나에게는 마음의 상태이기도 하고, 관찰해보고 싶은 대상이기도 하여서, 거미줄에 대한 탐구는 계속해보고 싶은 작업이다. 거미줄을 소재로 재미난 동시도 써보고 싶다. 지금은, 거미줄을 털고 빨래를 널러 가야할 아침. 이 글을 쓰는 동안 조용하게만 있던 그 녀석이 다가와, 글에 대한 집중을 흩어놓아도 자꾸 웃음이 난다. 오늘도 좋은 하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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