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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식지/산 위에서 부는 바람

<128호> 연습, 쓰기, 읽기

by 인권연대 숨 2022. 12. 26.

연습, 쓰기, 읽기

 

                                                    允

 

날아라 병아리*

 

병아리는 알 속에서 궁금했어

알 밖의 세상이
그래서 어느 날 겨우겨우

세상에 나왔지
세상을 돌아다녀 보니
쌀 한 알 먹는 것조차

물 한 모금 마시는 것조차
마음 한 조각 얻는 것조차

쉽지 않다는 걸 알게 되었지
그래서 병아리는 점점

커다란 알껍질을 만들었어
다른 병아리는 볼 수 없는
아마 병아리 자신도 알 수 없었을 거야 처음에는


단단해져 가는 알껍질 속에서 병아리는
이제 곧 병아리보다 이라는

이름으로 부를 텐데 어떻게 하지?
생각을 하지 말아볼까?
생각하지 않으면 무슨 의미로 세상을 살아가지?

조용히 있는 것 같아 보이던 병아리는 생각 했어 생각하고 또 생각했지
너무 답답하고 힘들어 외로워 어떡하지?

 

그러던 어느 날, 지나가는 바람이

네 탓이 아니야, 라고 말하는 걸

얼핏 들었어

그리고 또 어느 날,

바람에 떨어진 상수리 나뭇잎이

너 때문이 아니야, 라고도 말하는 걸

들었지 그리고 또 어떤 날,

닭장 옆에 피어난 구절초가

너는 그냥 너야, 라고 속삭이는 소리도 들었어


아직 병아리인 병아리는 알 속에서

가만히 바깥을 바라 보았어
눈 질끈 감고 말이야.
그리고 또 자기를 가만히 보아주기

시작했어


그래서, 어떻게 되었냐구?

병아리는 어쩔 수도 없이 자기가 만든

알껍질 속에 있다는 걸 이제, 알아

병아리를 사랑하는 햇살이

벌써부터 옆에 있다는 걸 다시, 알고
상수리나무에게도 말을 걸지

이제 막 태어난 병아리처럼 다시,

 

* N.EX.T의 노래날아라 병아리(1994)에서 따옴.

 

나의 쉽지 않은 지금 이 시절. 내 생애에서 내가 아픈 것보다 옆에서 지켜보는 것이 더 아픈 시절이라고 여겨지는 어느 때 시작된 시. 몇 달 전부터 쓰고 읽고 고치고 하는 <날아라 병아리>를 다시 고쳐 본다. 몇 번을 읽어야 몇 번을 고쳐야, 어디를 고쳐야, 무엇을 빼내야, 무엇을 더 넣어야, 어떻게 더 사유해야 하는지 여전히 모르겠다 싶은 ’, ‘동시의 길, 세계. 동시를 공부하고, 쓰고 노력하여도 동시에 대해 여전히 모르고 싶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지만, 나는 동시 속에서 내가 서 있어야하는 지점, 혹은 서 있고 싶은 지점을 알고 싶다. 하지만, 그것을 알기엔 아직 이른 것일까?. 삶에 대해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때가 있었다. 시에 대해 알만큼은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때가 있었다는 문장과 같은 문장. 무엇인가에 대해 알 만큼 안다고 여기는 때가 오기나 할 것인지 잘 모르겠지만. 올해 4월부터의 본격적인 동시 공부를 결산해 본다.

김 륭 시인의 프라이팬을 타고 가는 고양이를 시작으로, 마지막으로 조정인 시인의 웨하스를 먹는 시간까지 한 달에 두 번 줌 수업으로 선생님을 만나고 만날 때마다 두 세 권의 동시집을 읽고 리뷰를 쓰고, 창작시를 제출하였다. 적어도 동시집을 삼십 권을 읽었고, 리뷰를 열여섯 개 생산해 냈으며, 창작시 또한 열여섯 개 이상 낳았다. 그간 혼자 써놓았던 시를 늘이거나 줄이거나 지우거나, 지웠다가 아까워서 다시 배껴 썼다. 시를 백 편 쓰면 좋은 일이 생길 것이라며 시작했던 두꺼운 공책에 써 놓았던 시들도 노트북에 하나 하나 옮겼다. 그것 또한 썼다 지웠다 버렸다 휴지통에서 꺼냈다 하거나 혼자만의 밴드에 올려놓고, 늙어가는 눈 비벼가며 들여다보고 고치고, 잠자리에 누워서도 고치고, 그러다 눈이 시려 잠든 밤도 여러 날 보냈다. 온점을 찍었다 지웠다 반점을 찍었다 지웠다 다시 찍었다 하였다. 마치 처음 손바느질 배울 때, 홈질 한 땀에도 마음에 들지 않으면 그 줄을 뜯어냈던 것처럼., 내가 뭘 하고 있는 건지... 아주 나중에는 타인도 알게 될지도 모르는 그 내밀한 작업들. 아주 나중에도 타인은 몰라도 나만 아는 그 은근한 작업들. 어쩌면 이 과정을 통해 이미 나의 상상력의 한계를 맞닥뜨렸지만, 인정하지 못하고 있는 지도 모르겠다. 살면서 억눌러 왔던 상상력이, 나의 한계가 기지개를 켜기엔 아직 그 시기를 맞이하지 못해서 더 많은 읽기가, 더 깊은 쓰기가, 더 긴 연습이 필요하기도 하겠다. 사는 동안. 그리고 창작자로 살기보다 그저 눈 밝은 독자로 살아가는 편이 훨씬 편안하고 애쓰지 않아도 될 수도 있겠다. 내 마음에 드는 시 한 편을 쓰고 싶어서 애쓰면서도 더 애쓰지 못하는 것을 한탄하지 않아도 될 수도 있겠다. 열두 살 막내의 말처럼. 쓰는 거 쉽지 않아. 안 쓰는 거 나쁘지 않아.

하지만, 아직 쓰기에 초자인 나는 더 읽고, 알고 싶다. 이제 막 입문한 사람으로서. 그동안 시인선생님의 추천 시집과 다른 분야의 책을 쌓아놓았다. 그 사실만으로도 충분히 설렌다. 나를 기다리는 텍스트가 쌓여있고, 그 텍스트 읽기와 옮겨 쓰기, 리뷰 쓰기를 통해 나를 훈련할 기회가 무궁무진하다는 그 자체. 마치 나의 삶이 아직 끝나지 않은 것처럼. 언제 끝날지 알 수 없는 미지의 세계. 아직 걸어볼 세상이 나에게 있다는 그 자체. 지금까지 상상해왔던 것과는 다르게 상상할 수 있다는 그 사실만으로도 나는 열려있다. 출근할 때 매일 똑같은 길로만 가지는 않는 지금. 지금까지의 길에만 나를 묶어두지 않고, 무엇이 나의 길인지 나에게 은근히 묻고, 여러 길을 나에게 보여주고 싶다. 아름다움을 꿈꾸어도 좋다고, 빛나도 괜찮다고 여러 번 말해 주고 싶다. 나는 나를 데리고 밝은 곳에 가서 서 있고 싶다. 이제 상수리나무에게 다시, 말을 거는 병아리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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