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소식지/산 위에서 부는 바람

<129호> 포옹

by 인권연대 숨 2023. 1. 30.

포옹

                                                                                                    윤

 

아침에 눈을 뜨고 습관처럼 벌떡 일어나 쌀항아리 뚜껑을 재빠르게 열지 않는다. 가만히 눈을 뜨고, 코로 숨 쉬고 있는지를 본다. 뒷목이 편안한지 살핀다. 손바닥도 좀 비벼주고, 얼굴이 붓지는 않았는지 살피며 쓸어주고, 손가락이 붓지는 않았는지, 발뒤꿈치도 좀 만져주고, 왼손은 오른쪽 어깨에 오른손은 왼손 어깨에 올려 감싸 안는다. 토닥토닥. 그리고는 조용히 말해준다. 다시, 아침 맞은 것을 축하해. 오늘도 잘 부탁해. 때론 작은 목소리로, 때론 머릿속으로 속삭인다. 천천히 일어나 숨 들이마시고, 숨 내쉬며 겨울 창밖을 좀 바라보고, 전기주전자에 물을 올리고, 의자에 앉아 기다린다. 물이 데워지면 컵에 반쯤 담고, 찬물을 그 위에 담아 조금씩 조금씩 마신다. 천천히 해도 괜찮아, 말해준다. 나에게.

 

어느 날, 마주 앉은 상대에게서 들려온 나에 대한 나의 용서라는 말은 나에게는 자못, 무겁게 다가왔다. 마치 감당하지 못할 커다란 겨울방학 숙제를 여러 가지 받은 아이처럼 이 숙제를 어떻게 해야 하지? 이런 숙제는 생각해 본 적도 없는데 하며 이리저리 두리번거리며 다니면서, 계속 나에 대한 나의 용서라는 말을 반복하며 다른 사람들은 이 숙제를 어떻게 풀고 있지? 기웃거렸다.

 

마트에 가서 무얼 가장 먼저 사야 할까? 하는 질문을 나에게 슥 던지는 사람을 보기도 했다. 그 질문에 당근이라고 답할까? 토마토라고 답할까? 요구르트라 답할까? 머뭇거리고 있을 때, 그 사람은 자신이 먹고 싶은 것을 가장 먼저 고르면 좋겠다고, 심지어 자신이 좋아하는 뭔가를 사서 가방에 넣고 혼자 먹으라고 말했다. 매번 가족들에게 무얼 먹일까? 무얼 해줄까? 질문하지 않아도 괜찮다고 했다. 초콜릿 하나 사서 입안이 텁텁하고 기운 없을 때 혼자만 먹어도 괜찮다고 말하며 그는 수줍게 웃었다. 그 순간 예전에 친구가 너만 먹어.”라고 말하며 자신의 월급의 일부를 나의 통장에 넣어준 기억도 함께 났다. 어떤 사람은 자신을 위해 처음으로 야채스프를 끓였다고 말하며, 나에게도 한 그릇 내주었다. 코코넛 오일에 양파를 말갛게 될 때까지 볶다가 당근, 양배추, 감자, 샐러리, 토마토, 파슬리, 후추를 넣고 폭 끓인 순한 한 끼였다. 나도 따라서 그 간단하고 천천히 하는 음식을 끓여 먹었다. 오롯이 나를 위해서. 아마 삶의 수많은 어떤 지점에서 사람들은 나에게 너를 위해도 괜찮다고 말했을 것이다. 다정히. 지금쯤 나는 나를 위하는 것이 나만을 위하는 이기적인 것 이라고 해석하지 않는다. 그리고 때론 이기적인 것이 왜 나쁜가. 나에게 그럴만한 이유가 있지 않았겠나...라고 나에게 말해준다. 너에게 어떤 이유가 있었을 거야... 이 지점까지 오는데, 반백년이 걸렸다. 길지만 짧은 시간.

 

나의 시간을 거쳐 오는 동안, 무턱대고 다른 사람을 위하는 일에 자신을 끼워넣고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다고 억울해하는 사람을 보았다. 부탁을 거절하지 못해서 자신을 꾸역꾸역 그 일로 밀고 들어가 그 일속에서 힘들어하면서도 한 발짝도 떼지 못하는 사람도 보았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어떤 경계를 넘어와 자신의 삶을 휘젓는 사람에게 아무말 못하고 얼어붙어 있다가 돌아서서 그제야 할 말이 생각나 답답해하며 자신에게 화내는 사람을 보기도 하였다. 그는 나였다. 지금의 나이기도 하다. 지금의 내가 아니기도 하다.

 

일상에서 가끔 어떤 경험을 할 때마다 예전과 다르게 생각하거나 해석하거나 행동하는 나를 관찰하면서 생각하는 단어는 다시 태어난다라는 표현이다. 그러나 이것은 언어로는 표현하기 어려운 몸 어딘가에서 느껴지는 어떤 것이다. 그래서, 탁 알아질 때의 그 상태는 머리보다는 몸이 먼저 반응하는 어떤 상태. 죽고 싶다고 말하는 상대의 언어에 따져 묻기보다 그 외로움과 분노를 와락 껴안는 그런 몸의 언어. “백 바가지의 말보다 한 번의 포옹!” 마음을 표현하기 위해 엄청 많은 말보다 마음(기운)과 일치된 몸의 언어 한 가지가 낫다, 는 관용구를 적어서 뿌리고 싶은 생각을 하였다. 무엇인가에 대해 한 삼십분 동안 엄청 떠들어놓고는 아, 이렇게 많이 말하기보다 그냥, 말없이 손을 쓰다듬어 줄걸, 그냥 그동안 애많이 썼다고 말하며 안고 등을 쓰다듬어 줄 걸, 그냥 안고 얼마나 힘들었냐고 말해줄 걸 했다. 그 상대가 나이어도, 타인이어도.. 많은 말을 하고난 후 어떤 때 느끼는 아쉬움이라는 것이 멀리서 얼음이 녹고 봄이 오는 걸 누가 알려주지 않아도 벌써 몸이 아는 것처럼 그렇게 몸의 언어(만짐, 포옹)가 말보다 깊은 위로가 될 때가 있지 싶다.

 

수많은 실수와 실패를 건너 여기에 도착하고 여기를 지나가는 나는 외롭지만 외롭지 않고, 때론 서늘하지만 차갑지 않으며 따뜻하지만 무작정이지 않다. 그래서 가볍고, 겉은 아무런 변화가 없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무표정속에서 수많은 말을 들을 혹은 건넬 준비를 끝낸 자유로운 상태인 듯하다.

애쓰는 나에 대한, 애쓰지 않아도 그저 괜찮은, 실수를 용납하지 않는 나에 대한, 실수해도 괜찮은, ‘나에 대한 나의 용서의 자세이다.

 

'소식지 > 산 위에서 부는 바람' 카테고리의 다른 글

<131호> 두 번째 봄맞이  (0) 2023.03.27
<130호> 길을 나섰다  (0) 2023.02.27
<128호> 연습, 쓰기, 읽기  (0) 2022.12.26
<127호> 모노 드라마  (0) 2022.12.07
<126호> 비와 거미줄  (0) 2022.10.27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