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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식지/산 위에서 부는 바람

<127호> 모노 드라마

by 인권연대 숨 2022. 12. 7.

모노드라마

 

커피다운 커피를 마시지 못하고 하루를 지냈다는 생각에 아쉬움으로 커피머신 주위를 슬금거리던 나에게 커피를 제안하는 사람이 있었다. 솔깃하여 거절하지 않고 받아 마신 늦은 저녁의 옅고 구수한 커피는 어제를 오늘로 이어준다. 어제의 설레임이 오늘의 웃음으로 이어지듯 그렇게, 카페인 덕분에 오랜만에, 한밤중에 깨어 앉아 냉장고가 만드는 소음을 듣는다. 아이의 고른 숨소리도 들려온다, 뒤척이는 몸동작도 본다. 소리와 뒤척임이 있지만, 지금 이 모두가 고요이다. 자다가 깨어나 깜깜한 공기 속에 앉아 있을 때와는 다른 느낌이다. 왠지 충만한 지금이 좋다. 내일 피곤하면 어쩌나 하는 걱정은, 지금 없다.

칠월부터 시작된 금요일 밤의 데이트. 마을 언니 세 분과 금요일 밤 아홉 시에 모여 마음과 소리를 모아 묵주 기도를 1단 바치고, 15세기의 독일 수도자가 쓴 나름 카톨릭계의 클래식, 영성 생활의 길잡이가 되어주는 책의 한 부분을 소리 내어 읽고, 읽은 내용 중에 각자에게 와 닿은 단어나 문장, 읽으면서 든 생각, 다가온 음성을 돌아가며 이야기 나눈다. 이야기보따리를 한껏 풀어놓으면, 열두시를 넘길 때도 있지만, 괜찮다. 어차피 불금이니까...헤헷. 우리가 마시는 것은 결명자차이거나 계피차이거나 생수. 그날 읽은 내용과 맞닿은 노래가 있거나 나름 신곡이 있으면 언니들께 먼저 들려드리곤 했는데, 글라라 언니가 노래와 이야기를 넣은 모노드라마 공연을 우리 마을의 예술 공간에서 해보자 제안하였고, 나는 아무렇지도 않게 잘해서 하는 것 아니죠? 그저 저의 이야기를 들려드릴 수 있으면 좋겠어요”, 하며 가벼이 제안을 받아들였다. 두 달 여 동안 집에서 혼자 이렇게 불러보고 저렇게도 불러보며 기타도 두 줄 튕겼다 한 줄 튕겼다하며 연습하였다. 그리고 그 공간 무대에 한가운데 앉아 마이크에 얼굴을 가까이하고, 언니들 앞에서 저녁 8시마다 세 번의 리허설 후 네 번째 부를 때, 관객 앞에서 어색하고 어설프고 목소리가 약간 떨리는 그런 공연을 15분 정도 하였다. 떨렸지만, 엄청 긴장하지는 않았고, 천천히 노래하고, 천천히 이야기하고, 눈 감고 노래하고, 눈 맞추며 이야기하였다. 나에게 용기를 주려고 내가 가장 잘 바라볼 수 있는 위치에 서서 웃음을 보내는 모니카 언니를 바라보며 있었다. 언니와 마주 앉아 언니에게 들려드리듯 그렇게 고요하게 이야기를 전달하였다. 이마에 땀 송송 맺혔다. 코와 목이 잠길까봐 겨자색 목도리를 칭칭 두르고... 엄마, 그늘은 어둡다지만 한여름 뙤약볕 아래 내 자그마한 그늘에 들어와 쉬어요, 라는 노랫말의 전봇대를 기타 반주 없이 진짜 떨리지만, 조용히 부르고, 진달래 꽃봉오리 활짝 피어날 적에 내 마음도 피어나 활짝 열린다. 꽃마리와 꽃다지 낮고 작게 필 때에 내 마음도 열려 반짝 빛난다 봄꽃을 부르고, 꽃비에 내 마음을 얹어 보내니 그대 마음속에 밝은 빛 한 줄기 바라보기를 바라는 꽃비, 바위의 마음으로 사람의 시간을 살아가는 우리들을 노래한 난 좋아 바위, 고요한 마음으로 조용히 앉아 마음을 모으고 숨을 바라보면서 흘러가~라고 노래하는 까지 불렀다.

노랫말 속에는 무릎을 꿇고 보아야 겨우 보이는 꽃받침, 꽃마리꽃처럼 사소하고 작은 것들이, 바람에 넘실거리는 초록 물결이, 햇살 받고 피어난 제비꽃이, 아침 안개의 아스라함이 들어있다. 그것에 마음 주며, 그 작지만 커다란 존재에 기대어 있는 나의 마음이 들어 있다. 이래도 저래도 그냥 좋다, 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어느 날엔 대화가 전혀 통하지 않는 벽처럼 보일 수 있는 존재이지만, 그 존재는 사과나무를 가꾸듯, 포도나무를 보살피듯 사람을 향해 서서는 그를 기다리기도 하고 그저 존재하기도 한다. 나라고 여기던 것들이 흔들리고 부서져 깊이 아플지라도, 자연 속에서 자연과 하나가 되어 새로운 삶으로 방긋 솟아나고 싶다는 마음을 들여다보기까지의 과정이, 고요한 마음으로 숨을 바라보며 흐르고 싶은 마음이 담겨 있다. 자연을 바라보는 마음도.

공연장에서 고개를 끄덕이며 이야기를 들어주고, 몸을 양옆을 천천히 움직이며 함께 노래를 느껴주는 사람들에게 고마웠다. 저마다 평온함을 그리워하고, 매순간의 갈등 속에서도 애쓰고 있으며, 다들 한결같은 걸음으로 한순간 한순간 살아가는 존재라는 생각에, 뱃심이 약하여 커다란 소리를 내는 것을 두려워하는 나이지만, 그저 한 글자 한 글자에 위로와 위안, 편안함을 얹어 불렀다. 가을밤의 한 순간이 그렇게 지나갔다.

글라라 언니의 제안을 받아들이고, 마리아 언니의 응원을 받았다., 모니카 언니의 애정 담뿍 담긴 눈길과 공연 시작 전 긴장한 어깨를 쓰다듬어 주던 손길 또한 아직 내 어깨에 남아있다. 금요일 밤의 동맹, 그리고 그동안 소박한 노래를 공유한 친구들. 들어보아 주고 노랫말이 마음을 편안하게 한다고, 남편과 여행가며 듣고 있는데 풍경과 가사가 어우러져 참 좋다고, 오늘 피곤했던 몸과 마음 보내준 노래 들으며 피로를 풀고 잠든다고 피드백 주었던 친구들에게 고맙다. 그냥 공기 중으로 흩어질 소리이지만, 만들고 부르면서 웃고 울던 시간과 의미를 알아보아 주고, 함께 해 주고, 축하를 말해 준 사람들에게 고맙다. 화려하지도 않고, 흥겹지도 않고, 엄청 기교도 없는 단순하고 소박하고 고요한 노랫말과 가락이 나를 찾아오면 나는 또 받아 적고 연습하고 녹음하여 어느 날 슬며시, 공유를 터치할 것이다. 약간 떨리지만, 엄청 인정받고 싶은 마음은 내려놓고, 창피하고 수줍고 거절당하면 어떡하지 하는 마음은 저 멀리로 갔으니, 다시 잡아당기지도 않고 그렇게... 거미줄과 가을 아침과 꽃받침과 햇살과 나뭇잎과 아침 안개를 부르는 잔디의 노래 놀이를 즐겁게 즐길 것이다. 헤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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