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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식지/산 위에서 부는 바람

<130호> 길을 나섰다

by 인권연대 숨 2023. 2. 27.

                                                                                                       윤

 

며칠 동안 아이랑 의논하고 알아보고, 오랜만의 외출이니 무언가 맛있는 것도 먹자고 이야기도 나누고, 설레며 몇 시간 동안의 둘만의 웃음 가득한 데이트를 기대하였다. 아이는 아침 일찍 일어나 머리도 감고, 나름 단정해 보이는 상의를 선택하여 입었으며, 오전 일정이 좀 지연되어도 가고자 하는 음식점이 문 여는 시간까지는 배고프지 않을 양 만큼의 아침 식사도 조금 하였다, 동네 빵집에 들러 유자차와 아메리카노를 주문하여 조금씩 마시고, 따뜻한 기운이 감도는 한가한 오전 빵집의 기운에 약간 취해 있다가 아직 온기가 남아 있는 각자의 컵을 들고, 차에 타서는 웃으며 출발~~~!

 

목적지까지 가면서, 오늘 날씨에 비해 옷차림이 얇은 것 아닐까? 개학하기 전에 데이트할 수 있어서 좋다, 어제 저녁 식사 때 먹은 만두가 좀 짰나 봐... 금강의 얼음이 이젠 다 녹았네... 우수가 지나니 진짜 봄이 올 건가 봐, 저 물 위에 하얀 새는 오리일까? 뭐 그런 이야기를 하며 읍내에 다다랐다. 가족 사진을 잘 찍는다는 사진관에 들어섰다. 사장님이 어떻게 오셨냐? 묻기에 어제 전화하였던 사람인데, 라고 말하고 있는데 어제 하도 전화를 많이 받아서, 라는 소리가 들려왔고, 증명사진을 찍으려는데 아이의 앞머리가 좀 길어서 눈이 보이게 찍을 방법이 있나? 말하고 있는데, 그런 건 미용실에 가서 상담하시라는 소리가 또 들려왔다. 그래서, 아 그럼 미용실에 가서 준비를 다시 하고 오겠다고 대답하고는 그 사진관에서 나왔다. 아이의 옷이 얇아서, 근처 미용실을 둘러보다 가장 가까이에 있는 미용실을 찾아 들어갔고, 연륜 있어 보이는 분이라 뒷머리카락부터 단정히 정리하시는 걸 보며 안심하고 미용실 안에 있는 화분에 핀 꽃을 구경하다보니 아이가 일어섰다. 드라이 비용을 지불 하고 다시 길 위에 서니, 엄마 나 벌거벗겨진 것 같아, 라는 아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머리카락 모양이 마음에 들지 않는구나, 했더니 음, 아까 그 사진관에 다시 가고 싶지도 않고... 그런 저런 소리가 들려왔다. 우선, 주차한 곳까지 다시 걸어갔다. 차에 탔다. 음식점은 아직 열지 않을 시간이고, 아이는 아직 배고프지 않을 때였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식자재마트에 들러 원하는 식재료라도 사가지고 갈까 물으니, 딱히 생각나지 않는다 했다. 집에 있는 재료로 점심 해 먹자고 결론을 내리고 천천히 금강 옆을 지나오는 길로 돌아오며 우리는 한참은 침묵 속에 있다, 다시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사진관도 그렇고, 미용실도 그렇고 오늘의 선택은 좀 마음에 들지 않는 부분이 많은 선택이었다고, 그분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그렇게 말하는 사람 앞에서 사진을 찍고 싶지는 않았다고, 미용사분이 열심히 하시기는 하셨지만, 머리를 어떻게 파마하고 몇 시간 안 된 머리카락으로 만들어 놓느냐고 말하는 소리를 그냥 들었다. 그래, 많이 불편했구나, 하면서. 다 듣고 나서, 여러 식구들 중에 이렇게 둘 만이 웃기는 헤프닝을 갖는 몇 시간이었으니, 그걸로 그만이다 했다. 다음에 데이트할 기회를 또 가질 수 있게 되었다고 하하 웃으며, 그런 선택을 한 우리를 자책하지도 않고, 듣기에 다소 불편한 말을 한 사진관 사장님과 양배추 머리카락을 선사한 미용사님도 그저 흘려보냈다. 아이고, 아이에게는 만이천원이라고 말한, 드라이 비용 만오천원. 아깝다.

아이는 집에 도착하자마자 머리부터 다시 감고, 그러고 나서 해맑은 얼굴로 웃으며 다가와 배고파, 라고 말하였다. 돈까스를 바삭하게 튀겨 넓은 접시에 이지가지 담아 아이 방까지 배달 서비스하고 배달 비용까지 칠천오백원입니다~라고 농담하고, 여유있게 오후 출근하였다.

 

마음에 들지 않는 머리카락 모양이지만 이왕 나온 거 돈 들어갔으니 그냥 머리카락도 꾹 참고, 사진관 사장님도 사진 잘 찍으신다니 꾹 참고 사진 찍고, 그 머리카락으로 그래도 맛있는 거 먹으러 가자고 이 이유, 저 이유 다 끌어다 아이를 설득하려 하거나 내 쪽으로 잡아당기지 않는 나를 그냥 두었다. 살다 보면 이런 날도 있는 거라고 신경 쓰지 말라고, 아유 미용사님은 왜 그러셨다니? 으이구 그 사장님 말투는 참 장사 안되게 하시더라, 그런 말도 하지 않은 나를 그냥, 보았다. 다만, 엄마 나 벌거벗겨진 것 같아, 라는 말을 하는 아이의 불편한 마음과만 함께 있으려 했다. 그 읍내에 아는 사람이라고는 나와 너뿐인데 뭐가 창피하고 불편하냐고 말하지 않았다. 조금 있으면 음식점 개점 시간인데 기다렸다가 포장이라도 해서 집에 가지고 가서 먹자고도 하지 않았다. 다 컸는데 그깟 것 하나 못 참느냐고, 지진이 나서 집이 없냐고, 배부른 소리 한다고 말하지 않았다. 그냥 어떤 생각이든 어떤 마음이든 흘러가는 걸 보았다. 그 양배추 머리를 증거로 남기지 않아 그걸 볼 때마다 불편한 기억을 불러오는 행위를 하지 않은 우리의 선택을 존중한다.

 

금강을 지나면서, 아이에게 딱 한 가지는 물었다. 지금 자신에게 어떤 말을 하고 있냐고. 자책을 하고 있는지, 원망하고 있는지. 아이가 원망도 좀 있고, 자책도 좀 하고 있다 해서 우선, 오늘의 일로 네가 너를 찌르지는 않으면 좋겠다고 했다. 엄마도 그렇게 오래 살아왔지만, 아프고 힘들었다고. 그래서, 그 어느 순간에도 스스로에게 상처 주는 생각을 주기보다 아쉬움을 갖고 있는 스스로를 달래주자고 말했다. 기대했던 어떤 일이 이렇게 어그러진 것을 보는 스스로에 대한 위로를 하자고. 괴로워하고 있는 나를 괴롭히는 생각으로 더 아프게 하기보다 나를 달래주자고... 오늘이 또 그 한 번의 기회였고, 그걸 너와 함께 경험해서 감사하다고...그렇게 길을 걸어보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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