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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식지/산 위에서 부는 바람

<132호> 그가 나에게 갑자기, 왔다

by 인권연대 숨 2023. 4. 24.

그가 나에게 갑자기, 왔다.

 

숲속에 보리수나무의 흰 꽃이 활짝 피어나고 있을까... 밭 한 곁에 옮겨 심어 놓고 아까워서 캐 먹지 못했던 달래 그 몇 뿌리가 이젠 번져 번성하고 있을까... 가로등이 없어 칠흑처럼 깜깜하던 밤, 숲을 비추어주던 달님은 안녕할까. 겨우내 밭에 서 있던 파를 망설이며 뽑아먹던 마음은 어디로 흘러가고 있을까. 다시 피어나는 봄을 바라보는 시선 자체가 봄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깨어남을 보는 그 시선 자체가 깨어남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만약 그렇다면 나는 봄이고 또, 깨어남이라고, 깨어나고 있다고, 피어나고 있다고 고요한 마음으로, 감사하는 마음으로 말하고 싶다.

 

이렇게 삶에서 깨어나고 있는 이야기를 들려주고 들어주는 친구가 다녀가셨다. 한 달 새 두 분이 갑자기... 십 년 넘게 얼굴은 보지 못하고 봄맞이꽃이 피었을 때 꽃이 피었다고 소식을 전하고 그다음 해 봄엔 다시 또 꽃소식. 꽃의 안부로 서로의 안부를 전하다 다시 그 꽃이 피었다고 소식을 전할 즈음, 문자를 주고 받다가 내일 만나, 네 그래요... 그래서 만났다. 어제도 만나고 그제도 만나다 오늘도 만난 오래된 여유로. 오래전에 만났지만 이젠 낯설어진 손님 방문에 아이들이 당황스러워할까? 라는 생각, 그래도 오랜만인데 집에서 식사를 해드려야지 하며 생각하다가도 마을에 있는 갤러리나 식당으로 모셔야지 생각하고 있을 때, 아이들이 한 명씩 갑자기 토요일 외출을 한다. 그래서 빵집 앞에서 만나 집으로 걸어왔다, 조촐한 식사로 식탁에 마주 앉아 한 이십 년 전에 우리가 같이 일할 때, 산책길에 함께 찾아내고는 탄성을 지르던 봄맞이꽃이며 꽃마리, 누운주름잎꽃 이야기로, 이야기 꽃봉오리를 열었다. 그리고, 마주 앉아 대화하지 못하는 시간 동안 아픔을 건너온 이야기로 꽃을 피웠다. 그 아픔을 겪어오면서 생각이, 마음이 어떻게 변모하였는지... 세상이 나에게 준 선물과도 같은 그 몇 시간.

 

그리고 또 한 분도 그렇게 오셨다. 한 달에 두 번 하는 책 모임에서 책을 읽고 삶을 읽었다. 그날 우연하게도 책 모임에 회원분들이 두 분 오셨고 중간에 혹시라도 친구가 올 수도 있다고 양해를 구했고, 우리가 한 분의 마음을 공감하는 이야기를 하고 있을 때 그분도 오셨고, 인사를 나누고 자연스레 같이 이야기 나누었다. 그저 마치 계속 만나온 사람들처럼, 책 모임이 끝나고 우린 헤어지려다 차 앞에 서서 그렇게 또, 한 시간 정도를 이야기 나누었다. 그런 줄 모르고... 한 시간이 십 분처럼 느껴지는 마법을 가진 한 사람을 앞에 두고 나는 또 그렇게 삶을 듣고 삶을 말하고...

삶을 살아간다는 것이 자신을 흠뻑 사랑하는 것이라는 걸 이야기 나누는 지금이 좋다. 한 삼십 년 전 아이의 교사와 아이의 보호자로 만난 이후로 그 아이는 청년이 되어 우리에게서 독립한 지금, 친구로 서로를 마주 볼 수 있게 된 지금. 선생님과 어머님이라고 부르는 호칭을 떼어내고, 잔디와 언니로 서로를 부르게 된 것이 좋다. 자유로움으로 그렇게.

 

마음이라는 빈 밭에 아무데서나 날아와 앉아 자라난 풀을 어쩔 수 없이 길렀던 때가 있었다. 자라나는 줄도 모르고 내가 키우고 싶은 것인지 아닌지도 모르고 키우는 줄도 모르고 키웠다. 그런데 지금 그 풀마다 이름을 붙이고, ‘어 거기 있었어?’ 확인하고 계속 키울 것인지, 뽑아버릴 것인지 생각한다. 뽑아낸 자리가 허전하기도 하고 아프기도 하여서 쓸어주다, 키우고 싶은 새 씨앗을 다시, 심고 물을 주고 영양제도 주고 기른다. 어쩌면 그 씨앗은 이미 내 안에 있었으나 차마 발견하지 못했던 씨앗일 수도 있겠다. 그 마음 영농 과정에 대해, 그 마음에 대해, 그렇게 변모하는 수많은 연습에 대해, 실수에 대해 이야기를 자유롭게 나눌 수 있는 친구가 있다는 것은 은총이고, 감사다. 웃음도 울음도, 삶도 죽음도, 더럽다 여겨지는 것도 깨끗함이 계속 되었으면 하는 생각도 그 표면만이 아닌 그 아래의 마음까지도 함께 들여다보고 맞장구칠 수 있어서 그 가벼움과 유쾌함과 웃음과 편안함으로 우린 서로를 그리워하기도 하고, 이젠 가끔 번개처럼 만나기도 할 테니까. 지금 여기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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