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와 나
잔디
‘이야기 치료적 자기분석 보고서’학교 과제를 수행하는 친구 곁을 서성이다 보게 되었다. 여러 가지 이야기 치료적 방법이 있지만, 미국의 발달심리학자 맥아담스가 인생의 8가지 중요한 사건들이라는 참고자료도 있었다, 나도 친구 따라 시도해보았다.
이 과제는 나의 삶에서 겪었던 여덟 가지의 중요한 경험 기술하기를 기반으로 한다. 내 인생에서 최고의 순간은 언제였는지? 내 인생에서 가장 밑바닥에 떨어졌을 때는 언제였는지? 나 자신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인생의 전환점이 되는 사건은 무엇이었는지? 가장 어렸을 때의 기억은 무엇인지?(가장 오랫동안 기억하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 나의 아동기와 관련된 기억은 무엇인지? 청소년기의 경험과 기억이 현재 나와 어떤 연관을 갖고 있는지? 20대 이후의 중요한 기억은 무엇인지? 그 밖에 과거에 일어난 중요한 사건에 대한 기억은 무엇인지? 이 여덟가지 질문에 대답하다보면 그때의 아팠던 내가 떠올라서 다시 아파지기도 하지만, 그 이야기 속에 서 있는 내가 만들어 낸 의미와 나의 현실에 대한 나의 해석이 보인다고 할까? 또 다 지나가 잊었다고 생각되는 그 기억이 지금의 나와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도 보여서, 과거의 아팠던 좋았던 느낌보다 좀 처절해지기도 하였다.
나의 아동기 시절, 우리 학급에서 키가 가장 컸던 나는 농구부 선생님의 초대로 초등학교 3학년 겨울방학 때부터 학교에서 운영하는 농구부 부원이 되었다. 그때의 학교 운동부 대부분은 예산이 별로 없어서 유니폼도 운동화도 볼품없었지만, 간식도 우유팩 하나일 때가 대부분이었지만, 주변 여건은 관계없이 조용히 지내던 나에게는 농구를 하자는 농구부 선생님의 제안도, 내가 스스로 선택하여 농구를 하게 된 것도, 부모님께서도 별 말씀 없이 허락하신 것도 참 좋았다. 겨울방학의 추운 날씨에도 누구의 도움 없이 연습 시간에 빠지지 않고 스스로 참여하고 연습 시간을 즐기는 것, 농구 자체를 즐기는 것이 참 좋았다. 가족 이외의 타인과 길게 머무르고 정서적으로 교류하는 첫 경험이었다.
그 경험이 힘들지만, 즐겁게 하고 있던 5학년 때 제법 기술도 늘고, 비록 패배하였지만, 대회에도 나가서 시합도 해보고 한창 즐거웠던 그때, 가을에 관절염이 발병하였고, 할 수 없이 즐거운 농구를 그만 두고, 한의원이며 정형외과며 혼자 치료받으러 다녔다. 정형외과는 한 시간 정도 소요되는 거리에 있어서 시외버스를 타고 다녔는데, 워낙 체격이 어른 체격이라 초등학생이라고 말해도 학생증을 달라는 요구를 표 파는 분이 큰 목소리로 여러 번 반복하여서 울며 겨자먹기로 성인요금의 버스표를 구입하는 등의 경험을 홀로 하였다. 가정에 돌아와 이 경험에 대해서 말할 때, 네가 체격이 커서 그 사람이 오해했나 보다 라는 말이 들려왔고, 그때부터 어렴풋이 또래보다 훨씬 큰 나의 몸에 대해 사랑스럽지 않은 시선으로 보게 된 것 같다. 몸이 크면 그런 경우를 당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생각이 자리잡은 것 같기도 하고, 몸이 작은 친구들을 보호해야 한다는 생각이 함께 자리잡은 것 같다.
1년여의 치료로 관절염이 다 나아갈 무렵, 농구가 너무 하고 싶어서 딱 한 번 경기한 날, 어머니가 학교 옆을 지나가시다 그 광경을 보게 되었고, 그날 밤 아버지의 큰 호통과 함께 대문 밖으로 신발도 신지 못한 채 쫓겨났으며, 그날은 어머니도 너무 화가 나서 나를 외면하였고(아, 어머니도 아버지와 한 편이다라고 생각하였고), 다음날 아버지는 학교에 찾아와, 내가 내 아버지보다 더 아버지처럼 여기던 농구부 선생님에게 무언가 이야기하였고, 선생님은 곧 헤어짐이 인사도 없이 어디론가 전근을 가셨고, 나는 말 없는 아이가 되었다. 나 때문에, 이 많은 사람들의 마음이 어그러진 것이 미안했지만, 내 마음을 어디에도 말할 수 없는 것이, 말을 하여도 아무도 진심으로 들어주지 않는다는 외로움에 빠져들었다. 말할 수 없는 비밀을 쌓는 사람으로의 시작이었다고 생각되는 큰 사건이었다고 할 수 있겠다.
이어지는 기억, 공부가 좋았고, 공부하는 것이 즐거웠고, 공부할 때 가장 자유로왔던 것 같다. 공부는 나를 헤치지 않으니까. 그래서, 공부를 참 즐겨하고, 열심히 했다. 그래서 상도 많이 받았다. 4학년 때인가 어머니는 일하러 가시고, 일찍 퇴근하신 아버지께 상장을 보여드렸다. 아버지는 쓱 훑어보시더니, 동생들 기죽으니 어서 치우라고 말씀하셨다. 누군가에게든 이때의 나의 마음을 말했으면 좋았겠지만, 이 이야기를 듣고 어머니랑 아버지랑 또 싸움이 일어날까봐 이 이야기를 가족 이외의 사람에게 말하면 너네 아버지는 그런 사람이구나라는 말을 들을까봐 그날 이후 상장은 그냥 책상 서랍 속에서 쌓여갔다. 나는 범생이로 살았지만, 침묵하였으며, 침묵할 수 밖에 없었다고 생각되는 것이 학교 갔다 돌아오면 재잘거리며 학교에 들어갈 때부터 나올 때까지 일어난 일들을 밤늦게 퇴근하신 어머니께 이야기하는 동생들을 보며, 내 차례를 기다리다 곧 말하고자 하는 마음을 철회하였다. 두 서너 가지의 부업을 하며 자녀의 이야기를 듣는 어머니의 모습이 무척 힘들어 보였기 때문이다.
여덟 가지 질문 중에 두 가지 질문에 대한 나의 이야기를 들여다보았다. 지금 다시 읽어 보니 지금의 나와 그때의 나는 어떤 부분은 여전히 닮아있구나. 마음이 아프다. 하지만 여덟 가지 질문에 대답하고 나서, 종합적인 자기 분석에 대해 나는 또 이렇게 쓰기도 하였다. “위에 서술된 나의 이야기를 기반으로 하여 내가 만들어보고 싶은 미래는 무엇인지를 생각하여 보았다. 환영하지 받지 못하고, 인정받지 못하고, 사랑받지 못한 이야기의 각본을 쓰는 나였을 때는 그 생각과 나를 동일시하여 나 스스로를 돕지 못했다. 타인이 던진 화살을 얇고 초라한 방패 하나 없이 받아먹어 소화도 되지 않는, 소화하지도 못하는 날카로움을 삼켰었다면, 지금 나는 사랑받는 존재이고, 사랑할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을 안다.
나의 지난 이야기는 지나간 대로 두고, 지금부터 쓰는 이야기는 다른 이야기일 것이다. 나 자신을 이해하고 사랑하는 작업에 관한 이야기를 다시 쓸 것이다. 나 자신의 반짝거림으로 나를 이해하고, 내가 만나는 타인도 자신을 이해할 수 있도록 돕고 싶다. 그런 사랑 가득한 존재로 일상에서 어쩔 수 없이 끊임없이 다가오는 문제들을 겪고 싶지 않지만 겪을 수밖에 없는 그 이야기들을 하나 하나 풀어갈 것이다, 그리고 풀어나가는 과정을 누군가와 이야기 나눌 것이다. 말할 것이다. 내 이야기를 듣고 싶어 하는 사람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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