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녀왔습니다
잔디
친하지는 않지만, 어릴 적부터 내가 자라오면서 일 년에 두 세 번은 ‘친척’이라는 이름으로 만나 온 사람들이 총출연하는 자리에 갔다. 태어나서 처음 발 딛는 양평 땅. 운전하면서 본 양평대교 아래 흐르는 큰물이 인상적이었다.
이번 결혼식과 강원도 나들이의 참여자는 나를 포함한 우리 집 십대 초반의 사람 두 명이었는데, 인기가 좋았다. 딸아이에게 나의 어릴 적 모습을 기억하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똑같은 단어로 말했다. “어이구, 엄마 닮았네.” 그 소리를 들을 때마다 그저 웃던 딸아이는 기분이 어땠을지 아직 묻지 않았다. 어쨌든 늘 만나던 장소가 아닌 다른 장소에서 나의 엄마를 만나고, 엄마랑 가만히 앉아 밥 먹을 수 있어서 그것만으로 편안했다. 그래도 두리번거리게 되는 눈길. 연회장 흰 벽에는 다섯 살, 여섯 살 꼬물꼬물 하던 용운이가 맹세하는 동작을 하고는 신부를 번쩍 들어 안았다 내려놓는 장면이 흐르는데, 나보다 한 살 많은 지난해까지 대장암 치료를 받던 은옥이 언니가 파란 치마를 입고 혼주석에 앉아 신랑과 신부의 놀이는 쳐다보지도 않고, 움직임도 없이 앞만 바라보고 있다. 언니는 무슨 생각을 하며 저 자리에 앉아있을까... 식이 끝나고, 잠시 악수하는 사이에 언니가 어떤지 묻지 못하고, 언니 아들 키우느라 고생했어, 축하합니다,란 말만 전했다. 신랑 신부랑 눈인사하려고 기다리며 넓은 로비에 서 있는 동안 나의 오래된 사람들과 또 그 사람들과 닮은 사람들이 이리저리 왔다갔다하는 그 넓은 장소에 서서 은옥이 언니의 언니, 순옥이 언니랑 스탠딩 토크를 하며, 일상에 대해 말하다 자주 삐치는 어떤 사람에 대해 이야기하는데 언니가 아주 커다란 소리로 사람들이 원래 그래, 라고 말하는데 그 소리가 마치 놀람 교향곡의 어떤 부분처럼 들려왔다. 원래 그래, 라는 말을 전에는 체념하거나 어쩔 수 없이 뒤돌아서는 말로 내 안에서 해석했었는데, 그날은 내가 바꿀 수 없는 것을 바꿀 수 없음으로 인정하는 말로 들려 왔다. 그래서 이 문장이 생각이 났다. “ 제가 바꿀 수 없는 일에 대해서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는 평온을 주시고, 제가 바꿀 수 있는 일은 변화시킬 수 있는 용기를 주시며, 그 둘을 구별할 수 있는 지혜를 허락하소서.” 이 이 문장을 수첩에 적어놓고 이 말이 하려고 하는 말을, 의미를 궁금해하며 몇 달간 살았던 때도 있었다. 삶을 살아가면서 분별을 일으키지 않는 것이 평온의 길이라고 가르침을 받았지만, 굳이 분별을 해야 한다면 이 두 가지를 분별하는 지혜를 나도 청하고 싶다.
순옥 언니에게서 “원래 그래.”라는 사자성어를 전수받은 후 다시, 운전하며 친정집으로 가는 길. 자동차 세 대가 움직이는 관계로 휴게소에 내려 커피라도 한 잔씩 하자는 의견을 나누는데 누구는 저 휴게소, 또 다른 누구는 그 휴게소 하며 의견이 분분한데 돌아가는 길이 버겁지 않았다. 나의 원가족이지만, 또 나의 원가족이기에, 생각속에서는 그렇지 않다가도, 만나면 어쩔 수 없이 생겨나는 혹은 깔려있는 부담감이나 불편함이 있었는데, 아이고 나이 오십이 넘었는데 아직도 저러냐, 하는 생각이 올라오다가도 아, 원래 그랬지, 하면 불편함이 어디론가 벌써 사라지고 보이지 않았다. 아버지의 어떤 말씀도 아이고, 또~? 이런 생각이 올라오다가도 아, 원래 그러셨지. 하면 아버지 뭔가 불편하세요? 하는 말이, 아 그러셨구나 하는 말이 그저 나와서 아버지도 짜증보다는 아버지의 의도를 말씀하셨다. 그래서, 좋았다. 그리고, 십 대 청소년 세 명과 나의 막내 동생 혜니가 왁자지껄 아이스크림 돛대 놀이를 하면서 웃고, 울고 하는 모습을 보며 아버지께서 우리 손자들이 이렇게 커다란 소리로 웃으며 활기 있게 놀 수 있는 사람들이라는 걸 알게 되어 기쁘다고 말씀하시는 모습이 좋았다. 그리고, 또 집으로 돌아오기 위해 길을 나서기 전 벌써 우리집 차에 뭔가 잔뜩 차곡차곡 실어놓으신 아버지가 다른 사람들이 듣지 못하도록 나에게 소곤거리는 소리가 또, 좋았다. “두유는, 6월 15일까지 먹을 수 있을 것 같아. 수술 후에 아침마다 우리 큰 딸이 보내준 사랑을 먹는다고 생각하며 먹고 있다.” 엄마는 가끔 그저 슈퍼에 가면 사 먹을 수 있는데, 애가 넷이나 돼서 힘든 딸한테 왜 그 부담을 주는지 모르겠다고 말씀하고는 하시지만, 아버지가 필요한 걸 다른 이유를 가져와 설명하지 않고, 아버지 생각 속에서 일어나는 일을 나에게 이야기해 주시는 소리가 아름답게 들려와서 기뻤다. 좋았다. 우리가 지금 동시에 살아, 이런 소리 저런 소리 들려주고, 들을 수 있다는 그 자체가, 그 진정성이 좋았다. 천천히 엄마랑 살랑거리는 살랑교를 걷고 쉬다가 또 걷고, 비빔국수를 비벼 먹고 서두르지 않고 설거지하고, 또 서두르지 않는 속도록 느긋하게 운전하여 안전히 집으로 돌아올 수 있어서 또 좋았다.
집으로 돌아와 익숙한 의자에 앉아 라인 홀드 니버의 평온을 구하는 기도를 다시, 찾아 읽었다. “주여, 제가 바꿀 수 없는 일에 대해서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는 평온을 주시고 바꿀 수 있는 일은 변화시킬 수 있는 용기를 주시며, 그 둘을 구별할 수 있는 지혜를 허락하소서. 하루하루를 한껏 살아가게 하시고, 순간순간을 한껏 즐기도록 하시며, 고난이 평화에 이르는 길임을 받아들이게 하소서.“ 음, 나는 지금 새소리와 키보드 누르는 소리를 들으며, 가끔 창밖의 초록을 보며, 여기에 있다. 숨이 내 안으로 들어왔다, 다시 나가는 것을 느끼고, 다음 숨을 맞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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