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요에 헹구지 않으면
백무산
이른 아침 난데없이 꽃밭에 꽃이 흐드러진 건
내 탓이다
식전부터 앞뒤 다니며 쿵쿵거렸고
내 불면을 화풀이하느라 툴툴 바람을 울렸고
제 빛깔 다 머금기 전에
고요가 몸에 다 무르익기 전에
파르르 놀라 드러낸 건 꽃이 아니라 공포였다.
씨앗은 자신을 떠나 고요를 통과해야
자신을 불러낼 수 있기에,
누구나 깊은 잠을 자야 하는 이유는
몸을 떠난 고요를 불러들일 수 있기에,
잠은 하루치 노동을 지우고 고요를 불러들일 수 있기에,
해가 뜨면 내일이 되는 것이 아니라
육즙 빠져 쭈그렁바가지가 된 시간이
고요에 무르익어야 내일이 뜨기에,
시간을 고요에 헹구지 않으면 오늘을 반복할 뿐
내일의 다른 시간이 뜨지 않기에
- 거대한 일상(창비,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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