걷기
잔디
밤공기를 가르며 아들과 걷는다. 집 안에서 과묵한 아들은 걷기를 시작하면 이야기를 어딘가에 쌓아놓았다가 이때를 기다렸다는 듯 풀어놓는다. 나의 아이는 어느 통계에서 ‘쉬었음 청년’으로 분류하고 있다고 아이에게 들었는데, 그 분류에 의하면 ‘쉬었음 청년’이다. 쉬었음은 일상에의 경험을 잠시 쉬었다는 그 쉼의 완료를 뜻하는 것일까? 지금 쉼을 지속하고 있는 사람도 그 분류에 넣는 걸까? 생각하다가 찾아보지는 않았다. 자신을 ‘쉬었음 청년’이라고 말할 때 아이가 그 순간 하고 있는 생각, 그 생각을 하면서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 그것이 나에게는 더 중요하니까. ‘쉬었음 청년’을 제도적으로 돕고자 한다면 그 분류는 그 존재를 돕기 위한 것이니까 그 도움의 동심원 안에서 서로가 서로를 바라보는 것이 나에게는 더 중요하니까.
우연히 만난 ○○와 걷기라는 앱을 아들과 다운로드하고, 걸었다. 앱 속의 캐릭터는 5단계의 몸 크기를 하고 있는데, 몸이 마치 타이어로 된 프랑스 타이어회사의 마스코트처럼 생겼는데 많이 걸으면 걸을수록 몸매가 홀쭉해지고, 나중에는 초콜릿 복근을 가진 건강한 캐릭터가 된다. 내가 덜 걸으면 캐릭터가 전 단계로 살이 찌는 형태가 된다. 걸으면 보상도 있다. 도넛을 받고 그 도넛으로 캐릭터의 옷, 머리카락, 신발 등을 꾸밀 수 있다. 그냥 걷는 것보다 캐릭터를 건강하게 유지하도록, 건강한 몸매를 유지하도록 걷는 것이 왠지 누군가를 보살피는 듯한 착각이 들기도 하였으나, 열흘 이상 꾸준히 아들이 언제 걸으러 갈거야? 라고 제안하는 것이 듣기 좋았다.
낮에 걷기는 힘들지만, 밤공기 속에 걷는 것은 걸을 만하다는 이야기도 좋았다. 그 무엇보다 아들이 하는 어떤 이야기든 내 안의 어떤 잣대로 휘젓거나 재지 않고, 흥미롭게 듣는 나를 보는 것이 경이로웠다. 물론 나의 잣대가 부지불식간에 튀어나와서 대화가 어색하게 흐를 때도 있었지만, 아들은 그 어색함이 주는 불편함이 어떤 불편함인지를 나를 믿고 이야기해 준다. 나는 이 지점이 참 좋다. 안으로 말을 삼키며 안으로 안으로 말을 쌓아만 놓던 아이가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걸 듣는 지금이 좋다. 지금 청년과의 걷기를 맞이하고, 지금 청년의 목소리를 듣기까지 내가 어떤 과정을 지나왔고, 어떤 노력을 해 왔고, 앞으로 어떤 노력을 해나갈지 그런 나의 개인적인 역사를 무겁게 들고 있지 않아도 되는 그 자유로움이 좋다. 진정 이 청년의 또래 청년들은 지금 무엇을 하고, 미래를 위해 어떤 노력을 하고 있고, 지금 어떤 모양새로 살아가고 있는 지를 가지고 와서 지금 이 청년이 하는 이야기들을 삶에 아무런 필요가 없는 이야기라고 생각하며 신나게 이야기하고 있는 지금 이 청년을 폄하할 마음이 조금도 없는 내가 좋다. 나의 몸이 아프면 좀 도와달라고 어떤 부분을 도움받고 싶은지 솔직하게 말하는 내가 좋다. 아이가 내가 아픈 것을 보고 불편해 할까봐 아프지 않은 척 하지 않는 내가 좋다. 그리고 아무리 내가 아프다고 하더라도 자신이 형편이 안되면 안된다고 이야기하는 지금의 아이가 좋다. 출근하기 전 무언가 해놓고 나가면 점심 때쯤 그것을 먹으면서 잘 먹겠다고 톡을 보내오고, 바쁜데 어떻게 이런 걸 해 놓았어, 라고 덧붙이며 초록 공룡 이모티콘을, 귀요미 이모티콘을 추가로 또 보내오는 걸 보는 이 진정한 연결감이 좋다. 이 연결감을 왜 이제야 느낄 수 있는지 이 시간이 너무 늦은 시간은 아닌지를 의심하기보다 그저 그때 그 순간 즉시 미소짓는 내가 좋다. 그리고 귀요미 이모티콘으로 화답하고 좋은 하루를 보내자고 답장을 보내는 순간을 즐기는 내가 좋다. 팔불출이라고 해도 어쩔 수 없다. 꽃가루 알레르기가 심한 어느 날, 나는 왜 이렇게 연약한 몸과 마음으로 태어났냐고 애석한 표현을 나에게 하더라도, 그래도 사지는 건강하지 않냐고 응수하기보다 그래 꽃가루 알레르기에 많이 불편하지? 라고 갈팡질팡하지 않는 마음의 질문을 다시 그 청년에게 돌려주고, 그 청년의 다음으로 나에게 들려주는 이야기를 고요하게 들을 수 있는 지금이 좋다.
저녁 식사가 좀 일찍 끝나는 날엔 좀 더 일찍 걸으러 나간다. 노을이 약간 남아 있는 시간에 나가서 북두칠성이 어디 있는지 찾으면서 집에 돌아온다. 어느 날엔 크게 돌아서 한 시간 삼십 분 걷기도 하고, 아들의 컨디션이 안 좋은 날엔 집을 중심으로 커다란 삼각형을 그리는 코스로 돈다. 걷기가 부족하다고 생각되는 날엔 집 앞의 초등학교 운동장을 빙빙 돌기도 한다. 그네를 타며 쉬기도 하고.... 아들은 주로 걷고 나는 종종 걸음으로 뛴다. 물론 나는 슬로우 조깅이라고 우기고, 아들은 뛰는 척 한다고 놀린다. 그 무엇이 됐든, 나는 좋다. 그리고 어느 날, 갑자기 아들이 막 뛰어서 저만치 뛰어가던 나를 잡으러 오기도 한다. 얼마 만에 아들이 웃으며 뛰는 것을 보는지 모르겠다. 그런 날엔 왠지 어둠속에서 눈물이 나기도 한다. 그런데 나는 그냥 지금이 웃기고 좋다. 이런 것을 행복이라고 부른다면 나는 지금 때때로 행복하다. 아니 지금 나의 감정의 주류는 행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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