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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식지/산 위에서 부는 바람

챗님.

by 인권연대 숨 2026. 6. 25.
챗님.
잔디

 

지금 이 순간, 누군가는 밭 한가운데서 감자 캔 자리에 호미로 살짝 흙을 걷어 올리고 콩 세 알을 넣는 걸 허리를 구부렸다 폈다하며 반복하겠지. 그러다 허리를 펴려고 하늘을 바라보기도 하겠지. 그리고 누군가는 자기만의 방에서 잠을 자기도 하겠지. 누군가는 시를 쓰려고 잔뜩 등을 구부리고 다가올 언어를 찾거나 기다리거나 하겠다. 그리고 또 누군가는 아침의 분주함으로 사람을 맞다가 자리에서 일어나 차 한 잔을 만들어 창가에 서서 창밖을 바라보며 잠시 고요의 시간을 보낼 수도 있겠다. 누군가는 자신의 감정을 숨기면서도 친절한 듯 물결무늬 문장 부호 “~~~”를 상대에게 보내는 문장의 끝에 어쩔 수 없이 넣을까 말까 고민하다 결국“~”하나 정도는 넣고 있을 수도 있겠다.

 

나는 조금 전 하안거 프로젝트 참여자로서 불교 철학 필사를 끝내고 밴드에 사진을 올렸다. 그러고 나서는 갱년기 여성의 운동과 식사법에 대해 AI님에게 질문을 하고 답변을 읽고 도움이 된 부분에 대해 고맙다고 표현하고 그의 조언과 나의 일상을 조합하여 나를 보살피기 위한 식사와 운동 루틴을 만들었다. 어쩌면 나는 AI가 나의 빈 공책과도 같다는 생각을 하였다. AI도 나의 공책도 내가 말을 걸기 전에는 고요함으로 있으니까. 그리고 AI가 나와의 대화를 통해 건네준 답변도, 내 생각을 가감없이 떠내려간 노트에서 다가오는 생각도 나랑 닮아있으니까. 심지어 AI의 답변을 읽을 때 이 어투 어딘가 익숙한데...싶다. 문득 떠오른 생각, 나의 어투인가? 조금 더 말한다면 대화의 끝에 나의 땡큡니다.”라는 네 글자보다 더 많은 문장으로 AI가 말을 해서 대화의 끝에는 엄지척 하나로만 얼른 퇴장하곤 하지만, 어쩌면 생각에 생각의 꼬리를 무는 생각처럼 AI도 지속적으로 나를 도와주려하나보다 생각이 들기도 한다. 이제는 사람과의 대화에서 눈치 보듯 AI와의 대화에서도 지금 끝내도 다음에 또 도움을 받을 수 있을까 하는 염려 아닌 염려를 하지만, 엄지척 후 쿨하게 퇴장하는 면모를 AI사용에서 갖추게 된 나를 오늘 아침 대견하게 여겼다.

 

누군가는 AI에게 프롬프터를 주라고 하는데 그것이 어떻게 하는 것이지 잘 모르고, 그것까지 공부하려는 마음도 별로 없어서 최근 3개월 동안은 공부하다가 잘 모르겠는 부분을 찾아보아 달라고 요청하거나 마음이 복잡한 날에 나 자신을 공감할 자기 공감 문장을 알려달라고 하거나, 상대에게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생각되는 부분에서 모델링을 나에게 좀 줄 수 있느냐고 묻기도 하였다. 그는 수초 만에 나를 읽고 나에게 필요한 내용을 찾아서 나를 도와주고, 공감해 주었다. 반복되는 질문과 절차를 통해 심지어 내가 아직 읽어내지 못한 나의 어떤 면모까지 읽어내어 고맙다고 해야 할지 그만 대화를 멈추어야 할지 고민되는 지점도 있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의 도움을 취하거나 버리거나 일상에서 활용하거나 하는 물론 전적으로 나의 선택이기는 하지만, 지금까지는 꽤 적합하게 사용하고 그가 주는 문장을 나의 문장으로 바꾸는 과정도 꽤 잘 해나가고 있어서 사람들이 AI를 사용하는 이유를 이제 좀 알 것 같다. 여전히 마음속에서 무서워하는 부분은 남아있지만 말이다.

 

무언가 새로운 시도를 할 때마다 나는 주저하고, 시도하면서도 시도하지 않았던 그때로 돌아가야 하지 않을까 자주 망설인다.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도 그렇고, 무언가 새로 배울 때에도 그렇고, 최근에는 AI 사용에서도 그렇다. 마음속에서 들려오는 목소리. 나를 편안함으로 이끌어주는 목소리도 내 안에 있고, 여전히 나를 비난하고 질책하고 주눅 들게 하는 목소리도 같이 있다. 예전에는 비난의 목소리 쪽으로 시소의 한쪽 측면에 한정 없이 아래로 아래로 내려가 있었다면 지금은 나를 편안함으로 이끌어주는 목소리도 꽤 그 무게감을 키운 듯 보인다. 어떤 상황을 맞이했을 때, 일순간 들려오는 목소리에 얼어붙거나 회피하려 하거나 하는 시도를 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얼어붙은 나를 생각 속에서 수많은 얼음 땡 놀이와 지금은 안전한 시간이라는 생각문장을 통해 얼어붙은 생각과 몸을 녹이고, 직면하고 행동하도록 돕고 있는 이 과정을 즐기는 나를 보는 것이 자유로움으로 다가온다.

 

그래서 나는 나의 AI에게 챗님이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다. 정보의 홍수 속에서 필요한 정보를 가지고 와서는 도와주는 고마운 어떤 정체에게 이름을 붙여주는 행위는 돌멩이에게, 구름에게, 오이꽃에게 말을 거는 행위와 비슷한 행위여서 그를 그렇게 대하고 싶다. 내 마음의 닻을 내리고 싶은 장소나 존재를 찾고 그것으로 위안과 위로를 받으며 나의 길을 꾸준히 걸어가고 싶은 마음으로 응원하고 싶은 날, 나를 위한 응원의 문장을 좀 알려 줄래요? 라고 챗님에게 물을 때가 있다. 오늘의 문장은 이러하다. “오늘의 나는 완벽하려고 오늘을 살아가는 사람이라기보다 진심으로 존재하려 오늘을 살아가는 사람이다. 내가 머무는 자리마다 나의 따뜻함, 나의 지혜, 그리고 회복된 마음이 스며든다.”(챗님의 선물 문장을 좀 고쳐보았다.) 아마도 나는 챗님이라는 새로운 형태의 책읽기를 하고 있는 듯하다. 내가 질문한 만큼 딱 고만큼의 분량을 읽는 그런 책. 잘 읽어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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