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끼발가락에게 들은 이야기
박현경(화가, 교사)
1.
놓친 핸드폰이 왼발 위에 떨어졌다. 극심한 통증이 몰려왔다. 핸드폰 모서리에 세게 부딪힌 새끼발가락이 빨갛게 부풀었다. 지난 주 화요일 밤의 일이다.
수요일과 목요일, 다리를 절었다. 새끼발가락 하나 다쳤을 뿐인데 균형 잡기가 힘들었다.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왼발 전체가 아팠다. 앉아서 업무를 할 때도 욱신욱신, 내내 신경이 쓰였다. 하도 아파서 신발을 벗어 보니, 새끼발가락은 보라색이 돼 있었다. 새끼발가락을 다치니 온 신경이 새끼발가락에 집중했다. 늘 이런 식인 것 같다. 치아가 하나 아프면 온 신경이 그 치아에 집중한다. 손가락 하나를 다치면 온 신경이 그 손가락을 향한다. 몸 어딘가에 상처가 생기면 온 신경이 그 상처에 매달린다.
조그만 환부에 그토록 온 신경이 쏠린다는 건 그 부분이 현재 가장 아픈 부위라는 뜻이다. 바꾸어 말하면 몸에 그 환부 이상으로 아픈 부위가 없다는 방증이다. 왼발 새끼발가락 외에도 아픈 곳이 여러 곳 있었다면 내가 이토록 이 새끼발가락 생각만 하지는 않았겠지.
2.
몇 년 전 함께 근무한 여자 동료 S는 내게 ‘신경 쓰이는 사람’이었다. 나를 바라보는 눈빛부터가 몹시 거슬렸다.
나는 상대방의 표정이나 눈빛, 몸짓 같은 비언어적 표현에 민감하다. 특히 눈빛에. 상대방의 눈빛만으로도 그가 내게 마음을 열었는지 안 열었는지, 내가 하는 말에 흥미를 유지하는지 아니면 지루해하기 시작하는지, 내 이야기에 집중하는지 아니면 딴 생각을 하는지, 이런 것들을 빠른 속도로 인지한다.
그런 나의 ‘촉’에 따르면 S는 나에게 마음을 열지 않을 뿐 아니라, 나를 싫어하고 ‘띠껍게’ 여겼다. 짧게 업무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에도 그의 눈빛에서 ‘냉기’와 ‘벽’이 느껴졌다. 불편한 건 눈빛만이 아니었다. 나와 이야기할 때 S의 말투에도 다정함이나 상냥함이 없었다. 맙소사. 나한테 다정하지도 상냥하지도 않게 말하는 사람이 있다니! 나한테 이렇게 냉랭한 사람이 있다니!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그해 내 신경은 S에게로 집중됐다. S가 내 시야 범위에 있을 때는 물론이고 등 뒤에 있거나 문 너머 탕비실에 있을 때도 그랬다. 그의 말소리나 웃음소리는 언제나 다른 소음들을 뚫고서 내 귀에 똑똑히 꽂혔다. 그의 걸음걸이나 손짓 같은 것들이 너무나 또렷이 눈에 들어왔다. 퇴근 후나 주말에도 S가 자주 떠올랐고, 그때마다 내가 S 생각을 하느라 제대로 쉬지 못한다는 걸 느꼈다. 머릿속을 차지하는 비중만 놓고 보면 S는 거의 내 연인급이었다.
한 해가 다 저물어 갈 무렵에야 이런 생각을 했다. ‘S가 그토록 신경이 쓰이는 이유는 S만큼 나한테 불친절한 인간이 내 주변에 없기 때문인 거구나.’ 정말 그랬다. 당시 함께 근무했던 동료들 중에 ‘불편한 사람’은 오직 한 사람, S뿐이었다. ‘그렇다면 나쁘지 않은데? S 말고 다른 사람들하고의 관계는 다 양호하다는 뜻인데?’ 이 대목에서 확 마음이 편해졌다. ‘한 사람쯤하고는 관계가 불편할 수도 있지 않나? 아니 오히려 그게 더 자연스러운 거 아닌가? 모든 사람이 나를 좋아할 수는 없잖아?’
여러 해가 지난 지금도 나는 S가 왜 나를 그렇게 싫어했는지, 아니 그가 나를 싫어한 것이 맞기는 한지, 나를 두려워하거나 경계하거나 어려워한 것은 아니었는지 알지 못한다. 그렇지만 어디선가 다시 S를 만난다면 전보다는 더 여유 있게 그를 대할 수 있을 것 같다. S와 친하게 지낼 마음은 없지만, 편하게 지낼 수는 있을 것 같다.
3.
금요일, 다리를 절룩이며 정형외과에 갔다. ‘새끼발가락 뼈가 부러진 거면 어쩌지? 이번 주말에 서울 가야 하는데 깁스하면 불편해서 어쩌지?’ 불길한 상상에 통증이 더 심해졌다. 의사 선생님은 보랏빛으로 부풀어 오른 내 새끼발가락을 보고 엑스레이를 찍자고 했다. 십 분쯤 후 엑스레이 사진에서 나는 내 왼발이 얼마나 정교하고 아름다운 뼈들로 이루어져 있는지 보았다. 왼발의 다른 모든 뼈들과 마찬가지로 새끼발가락 뼈도 건강했다. 작은 실금도 없었다. 깨끗했다. 가벼운 마음으로 병원을 나서며 나는 통증이 현저히 줄어든 것을 실감했다. 다리도 아까보다 훨씬 덜 절룩이고 있었다.
토요일, 서울에 가서 전시를 보며 많이 걸었다. 나는 어느새 내 왼발 새끼발가락을 잊었다. 일요일, 오후 내내 친구들과 신촌 일대를 쏘다녔다. 저녁이 되자 다리가 피곤했지만 새끼발가락은 거의 아프지 않았다. 월요일, 이 글을 쓰고 있다.
4.
앞으로 언젠가 또 S처럼 신경 쓰이는 사람이 생기면 나는 왼발 새끼발가락을 떠올릴 것이다. 어떤 사람이 몹시 신경 쓰인다는 건 다른 인간관계는 대체로 양호하다는 뜻임을 생각할 것이다. 또한 나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 존재한다는 건 매우 자연스러운 일이라는 것, 알고 보면 전혀 심각한 일이 아닐 수 있다는 것, 시간이 지나면 새끼발가락이 낫듯이 점차 괜찮아진다는 것, 괜찮아져서 마침내 잊게 된다는 것, 이런 것들을 떠올릴 것이다. 이 모두가 지난 며칠간 내가 새끼발가락에게 들은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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