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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식지/현경이랑 세상읽기

장소들

by 인권연대 숨 2026. 6. 25.
장소들
박현경(화가, 교사)

 

1.

상담을 받고 나면 거의 언제나 눈물이 난다. 눈물을 훔치며 도교육청 건물을 빠져나온다. 저 길 건너편엔 버거킹이 있다. 거기까지만 걸어가면 목을 축이며 쉴 수 있다. 아니 숨어 있을 수 있다.

금방이라도 주저앉을 듯한 기분으로 겨우 걸어서 버거킹에 들어선다. 스프라이트 제로 라지가 할인해서 천 원이다. 달콤하고 톡톡 쏘고 시원한 스프라이트를 한 모금 또 한 모금 삼키며 남몰래 운다. 그렇게 삼십 분이 흐르면 나는 다시 씩씩하게 일어나 걷고, 버스를 타고, 또 걸어 집에까지 갈 수 있다.

그럴 수 있는 힘을 얻는 장소, 도교육청 맞은편 버거킹 1층 구석 자리가 나의 명당이다.

 

2.

작업실에 들어설 때마다 안도감에 젖는다. 바닥엔 고양이 털 뭉치와 종잇조각이 굴러다니고, 책상 위엔 물감 튜브, 물뿌리개, 드라이기 등이 뒤엉켜 있는 곳. 종이상자나 은박 충전재로 포장한 커다란 액자들이 벽에 기대어 있고, 높은 확률로 그 틈바구니 어딘가에 봉순이(고양이)가 있다. 나를 발견하고 목청껏 야옹댄다.

청소한 지는 1년쯤 되고 정리한 지는 2년쯤 된 이 날것의 공간이 내게 편안함을 주고 이곳의 공기가 내 숨통을 트이게 한다. 내 아이폰을 블루투스 오디오에 연결해 음악을 켠다. 요즘 자주 듣는 노래는 이랑의 ‘Shame’우리의 방’, 신지훈의 자유비행’, 김필선의 마마등이다. 작업을 하든 안 하든 이곳에서 나는 마음껏 이완하며 새 힘을 얻는다.

 

3.

이른 아침 눈을 뜨면 식탁 앞으로 간다. 5년 동안 매일 짤막하게 기록을 남기는 ‘5년 일기장과 따끈한 커피 한 잔을 식탁 위에 놓는다. 내가 의자에 앉으면 왕순이(고양이)가 기다렸다는 듯 식탁 위로 올라온다. 나는 양반다리를 하고서 왕순이에게 눈을 찡긋하며 한 손으로 내 허벅지를 탁탁 가볍게 친다. 그러면 왕순이는 내 다리 위에 편안히 자리를 잡고 앉는다. 그렇게 나의 아침 리추얼이 진행된다.

식탁 앞은 내가 일상의 속도를 늦추고 나의 삶이 지금 어디로 어떻게 흘러가고 있는지 돌아보는 자리다. 매일 아침 5년 일기장에 어제의 일을 최대한 압축해서 적는다. 하루 동안 있었던 수많은 일들 중 나 자신이 무엇을 중요하게 생각하는지를 발견할 수 있다. , 어제 그 바쁜 하루를 보내는 와중에 점심때 사무실 근처 식당에 가서 비빔밥을 맛있게 먹은 것이 내게는 꼭 기록할 만한 일이었구나! 또한 1년 전, 2년 전 오늘의 일기를 보면 그때의 그 하루가 생생하게 떠오른다. 과거의 나 자신아, 퍽 애를 쓰고 있었구나. 고생이 많았구나.

 

4.

걸어서 출근하는 길, 수암골 언덕배기에서 내려오면 지나는 길목. 이 근처만 오면 나는 두리번두리번 카오스를 찾는다. 카오스는 이 지점에서 자주 마주치는 길고양이다. 한쪽 귀가 살짝 잘려 있는 걸 보면 중성화 수술을 했다. 금빛 털에 윤기가 좌르르 나고 건강한 체격이다. 동네에서 누군가 밥도 챙겨 주고 물도 챙겨 주는 것 같아 다행이다.

처음 만난 날부터 카오스는 나를 이미 알고 있기라도 하듯 반갑게 달려왔다. 내 다리 사이를 비비적비비적 몇 번이나 오가며 군청색 정장 바지에 금빛 털을 잔뜩 묻혀 주었다. 내가 쪼그리고 앉아 카오스에게 눈을 찡긋하자 카오스도 내게 눈을 찡긋했다. 내가 발길을 재촉하자 수십 미터나 나를 졸졸 따라왔다.

어떤 날은 카오스를 만나고 또 어떤 날은 만나지 못한다. 카오스를 만나는 날이면 나의 바지는 어김없이 금빛 털투성이가 되고 내 출근은 지연된다. 카오스를 만나지 못하는 날이면 나는 수십 미터를 걷는 내내 자꾸 뒤를 돌아본다. 이 근처를 지날 때면 늘 마음이 설렌다.

 

5.

어떤 장소들은 힘이 있다. 우리를 살아가게 하는 힘. 오늘도 그 장소들을 지나고 그 장소들에 머무르며 하루를 산다.

바라건대 나의 존재가 누군가에게는 그 장소들 중 하나였으면 한다.

 

천사 50, 박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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