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발 직전의 혹성을 탈출하는 기분으로 교무실 문을 나선다. 첩보원이 도청 장치를 만지듯 재빠르게 귀에 이어폰을 꽂는다. 팟캐스트 재생 버튼을 누르면 흘러나오는 ‘매불쇼’나 ‘김현정의 뉴스쇼’ 또는 ‘검은 방’, 아님 뭐든. 아, 산소 같은 이 소리……. 나는 심호흡을 한다. 사실, 폭발 직전인 건 교무실이 아니라 나 자신이었다. 숨 쉬는 것까지 대학 입시를 위해 이루어지는 듯한 이 견고한 시스템의 한 부품으로 움직이노라면, 내 존재가 희미해져 가는 느낌에 숨이 가쁘다. 그리고 내 안엔 ‘딴짓, 딴짓, 이거 말고 딴짓!’이라는 강렬한 욕구가 부풀어 오른다. 좋아하는 방송을 통해 ‘다른 세상’과 교신하는 건 이 혹성을 벗어나며 가장 즉각적으로 할 수 있는 딴짓. 성적이나 입시가 아닌 ‘다른 세상’ 이야기에 달게 귀 기울이며 교문을 빠져나오는 사이, 무겁고 끈덕진 ‘일 걱정’을 떨치고 나는 서서히 대기권을 이탈한다. 그립던 ‘다른 세상’에 진입한다.
집으로 걸어오는 길, 어두운 골목 속 길고양이에게 눈을 깜박이는 것도 재미난 딴짓이고, 편의점에 들러 과자나 음료수를 구경하는 것도 달콤한 딴짓이다. 그러나 뭐니 뭐니 해도 가장 기막힌 딴짓은 집에 도착하자마자 가방을 던져 버리고 앉아 그림을 그리는 것. 운이 좋으면 삼십여 분, 아니면 단 오 분이라도. 며칠 전 색칠하다 덮어 둔 그림을 펼쳐 삭삭삭 색연필을 움직이다 보면, 그 짧은 시간 동안 영원과 접선하는 느낌. 희미해졌던 내 존재가 빛깔을 되찾는 느낌. 색연필을 거쳐 손으로 전해지는 결 고운 종이의 질감. 서로서로 부드러이 섞이며 리듬을 타고 춤추는 색깔들. 종종대며 보낸 하루가 저만치 물러나고, 난 어느새 ‘다른 세상’의 한가운데서 쉬고 있다. 이 잠깐의 딴짓이 지쳤던 나를 딴사람으로 만들어 준다.
하지만 이런 행운을 누릴 수 있는 날은 많지 않다. 더 이상 무엇을 할 여력이 없을 때까지 일하다 딴짓에 주린 채 하루를 마치는 날이 훨씬 많다. 그리고 그런 날이 반복될수록 나는 슬퍼진다. 일에 치여 내 존재가 지워져 가고 내가 그저 이 입시 메커니즘의 부품이라 여겨질 때 나를 꽉 누르는 건, 고달픔을 넘어서는 깊은 슬픔이다. 그럴 때 정신을 바짝 차리지 않으면, 미움이 싹튼다. 내 앞의 이 학생이 얼마나 귀하고 여린 사람인지 잊은 채 귀찮고 짜증스럽게 여기게 된다. 깜박하는 사이 그 귀하고 여린 존재를 말이나 눈빛으로 확 밀치게 될 수도 있다. 정신을 차리고 보면 더 슬프다. 난 도대체 무엇 하는 사람인가? 부품으로서 일하느라 지쳐서 사람으로서의 일(오늘 만나는 이 친구들이랑 사랑을 나누는 일!)을 내팽개치다니?
그 쓰라린 슬픔이 너무 싫어서 나는 더욱 필사적으로 딴짓을 한다. 학생들의 성적이나 대학 입시를 위한 일도 아니고 내 밥벌이와도 관계없으나 나를 ‘나’이게 하고 살아 있게 하는 일들, 예컨대 그림을 그리고 좋아하는 방송을 듣는 것, 매일 아침 짤막한 명상, 밤 시간 잠깐의 요가, 그리고 무엇보다도, 사랑하는 이와 이야기 나누며 웃고 쉬기……. 내 존재가 이 신성한 딴짓들로 푹 젖어 있을 때 비로소 나는 일터에서도 부품이 아닌 ‘사람’, 나만의 고유한 빛깔과 숨결을 간직한 ‘사람’일 수 있고 오늘 마주치는 친구들 한 명 한 명의 소중함을 잊지 않을 수 있다.
개탄스런 노동 현실 속, 이 딴짓 예찬은 어쩌면 철없는 사치일지 모른다. 하지만 나의 딴짓 사랑은 노동자의 한 사람으로서 팍팍한 시스템 속에서도 삶에 대한 사랑을 잃지 않으려는 진지한 저항이다. 아무리 숭고한 목적이 있다 해도, 구성원 각자에게 자신만의 딴짓을 즐기며 쉴 여유를 주지 않는 시스템은 나쁘다. 우리 사회에 가득한 이 나쁜 시스템들을 좋게 고쳐 나가는 데에 나도 조금이나마 보탬이 됐으면 좋겠다. 그리고 언젠가는 이 사회의 모든 사람들이 맘껏 딴짓하며 쉬고 일터에서도 자신만의 고유한 빛깔과 숨결을 누리며 날마다 사람답게 살 수 있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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