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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식지/마음거울

<제89호> 그렇게 그 집과 화해를 했다_박현경(교사)

by 사람이 되어 숨을 쉬었다. 2019. 10. 24.

 

그 집은 오랫동안 나의 콤플렉스였다. 부모님이 사랑과 정성을 다해 가꾸신 보금자리였고 엄마, 아빠, 언니, , 네 식구가 오손도손 일상을 일구는 소중한 터전이었건만, 나는 우리 집이 창피했다. 군산시 문화동, 언제나 바닥에 물기가 흥건한 재래시장 안 골목, 부모님이 운영하시던 조그만 속옷 가게 앞 빈 점포, 그 내부를 살림집으로 개조하고 시멘트 블록으로 2층을 올린 집. 그 집은 볕이 거의 들지 않고 습기가 많아 곰팡이가 잘 생겼고, 그래서 엄마는 하루에도 몇 번씩 방을 닦고 또 닦으셨다. 여름엔 찜통, 겨울엔 냉골이었다. 하지만 우린 그 집에서 하루하루 행복하게 지냈다. 책도 많이 읽고 그림도 그리고 공부도 열심히 했다. 같은 골목에 살던 유릿집 아이, 빵집 아이, 떡집 아이 들이랑 어울려 노는 것도 즐거웠다.

 

그런데 자라면서 겪은 몇 가지 사소한 일들이 내 마음 여기저기에 손톱자국 같은 걸 남겼다. 이를테면 이런 일이 있었다. 초등학교 5학년 때 학교 대표로 현미경 관찰 대회에 나가게 됐는데, 매일 방과 후에 내게 대회 준비를 시켜 주시던 선생님이 어느 날 우리 집이 어딘지 물으셔서 대답해 드렸다. 그러자 그분은 몹시 가엾다는 표정으로 그렇구나. 현경이네가 시장에 사는구나. 현경이가 공부 열심히 해서 나중에 부모님 잘 모셔. 알겠지?”라고 아주 다정하게 말씀하셨다. 분명 그분은 선의를 가득 담아 말씀하셨는데 나는 모욕을 당했다고 느꼈다. 이 일을 계기로 그 선생님을 미워하게 됐다. 평소에 믿고 따르던 분이었는데, 어쩐지 이 일만큼은 용서가 안 됐다. , 초등학교 6학년 때였나? 학교에서 돌아와 집에서 숙제를 하다가 잠깐 집 밖에 나왔을 때 내 뒤통수 너머로 까르륵 웃으며 저거 봐라, 쟤 저기 산다!” 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반사적으로 뒤를 돌아보자 후다닥 도망치던 두 여자애. 그때 나랑 라이벌 관계에 있던 아이의 목소리였기에 더욱 기억에 남는다. 일일이 늘어놓기 구차할 만큼 자잘한 이런 일들을 겪는 사이 나는 이 창고 같은 집을 나서는 꼴을 누군가에게 보이기 싫어, 밖에 나가려 문을 열기 전이면 늘 귀를 쫑긋 세우고 바깥 동정을 살피는 습관이 생겼다. 내가 대학생이었을 때 우리 가족은 군산을 완전히 떠나왔지만, 그 후로도 나는 그 골목에 살았다는 걸 밝히게 될까 봐 군산 출신이거나 군산을 잘 아는 사람과는 일부러 거리를 두기도 했다.

 

남편은 연애 시절부터 내게 줄기차게 그 집에 같이 가 보자고 졸랐고, 나는 몇 번이나 싫다고 했다. 남편이 어린 시절을 보낸 퇴계원 동네랑 학교까지 다 따라가 본 나였지만, 그 집을 보여 주는 일만큼은 내 치부를 드러내는 일인 것 같아 싫었다. 결혼한 뒤 한참이 지나서야 용기를 내어 남편과 함께 그 골목에 갔다. 떠나온 지 십일 년 만이었다. 한때 손님들로 흥성댔던 그 시장은 이제 폐허나 다름없었다. 시간이 정지한 듯 텅 빈 그 골목, 엄마, 아빠가 장사를 하셨던 가게랑 우리 네 식구가 살았던 그 집이 셔터가 내려진 채 거기 있었다. 우리 식구의 이십여 년이 담긴 곳이었다. 나는 눈물을 흘리지 않으려 애쓰며 남편에게 얘기해 줬다. 저기가 우리 집이었고 그 맞은편에 빵집 식구랑 유릿집 식구가 살았고 여긴 떡집이었고 집집마다 딸내미들이 있어 이 골목에서 같이 놀았고……. 얘기를 듣던 남편이 탄식했다. “, 진짜 재밌었겠다!” 뜻밖의 반응에 나는 남편을 돌아봤다. 남편은 계속해서 말했다. “나도 어렸을 때 이 동네에 같이 살았으면 너무 좋았을 텐데! 진짜 재밌었을 텐데! , 좋았겠다!” 남편의 두 눈이 부러움으로 글썽이고 있었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내 안에 엉켜 있던 오랜 매듭이 탁 풀린 것은. 구질구질한 잿빛으로 기억되던 이곳에서의 나날이 순식간에 색색깔을 되찾은 것은. 어쩌면 그토록 잊고 있었던 걸까? 여기서 사는 동안 우리가 얼마나 행복했는지, 우리의 하루하루가 얼마나 빛났는지를……. 나는 남편을 꼭 끌어안았다. 그렇게 그 집과 화해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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