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이렇게 내가 싫어하고 두려워하는 상황에 처하게 됐을까 생각해 본다. 모든 일에는 다 이유가 있겠지. 그럴 것이다. 지금의 이 일에도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것도 아주 좋은 이유가……. 괴로워할 만큼 괴로워하고 나면, 이 일도 순조로이 지나갈 것이다.’
2020년 1월 5일, 힘겹게 마음을 추슬러 가며 일기장에 적은 문장들이다.
마땅히 수개월 전에 해 두었어야 하는 행정적 처리 한 가지를 내가 놓쳤으며 이제라도 어서 이를 수습해야 한다는 걸 알게 된 건 2019년 12월 31일 늦은 오후였다. 겨울방학식을 마치고 조퇴했던 나는 상황을 파악하자마자 부랴부랴 학교로 복귀했다. 그리고 그로부터 일주일여가 지난 1월 8일 오전에야 이 일은 해결되었다. 일을 처리하는 그 기간 내내 나는 심한 열 감기를 앓듯 시달리며 몹시 마음고생을 했다. 내 잘못 때문에 다른 사람이 피해를 입을까 봐 두려웠고, 그 사람으로부터 비난을 받는 장면이 자꾸만 상상돼 괴로웠다. 방학이라 출근하지 않으셔도 되는 선생님께서 이 일로 학교에 나오시게 된 것도, 관련 공문 내용을 내가 부정확하게 전해 또 다른 선생님께서 서류를 거듭 작성하시게 된 것도 다 너무 죄송했다. ‘내 나름으론 빈틈없이 일하려 애쓰면서 열심히 근무해 왔는데, 결국은 내가 벌인 빈틈으로 민폐를 끼치는구나!’ 변명과 자책의 말들이 나방 떼처럼 팔랑팔랑 머릿속을 어지럽혔고, 불안과 긴장은 퇴근 후의 시간은 물론 꿈속까지 야금야금 파고들었다.
그런 속에서도 하루를 완전히 망쳐 버리지는 않으려고, 오늘을 소중히 보내려고 안간힘을 썼는데, 위의 일기는 바로 그 안간힘의 산물(産物)이다. 내게 일어나는 어떤 일에도 다 이유가 있으며 그 이유는 분명 좋은 것일 거라는 믿음, 이 믿음은 나를 떠받쳐 주는 기둥이었다. 그리고 그 믿음은 틀리지 않았다. 이 일을 통해 얻은 소중한 배움과 느낌, 그게 바로 이 일이 온 ‘좋은 이유’인 것이다.
특히, 주변 사람들에게 느낀 깊은 고마움은 두고두고 힘이 될 값진 자양분이다. 우선 교감선생님께서는 시종일관 아주 짧게라도 혹은 지극히 부드러운 방식으로라도 내 잘못을 나무라는 말씀은 단 한 마디도 하지 않으시고, 오로지 상황을 함께 해결해 나가는 데에만 집중하셨다. 나는 그게 너무나, 너무나 고마웠다. 그리고 앞으로 학생들을 비롯한 그 누구의 실수 앞에서도 나 역시 그렇게 행동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또한, 나랑 결이 다른 분인 것 같아 평소 경원(敬遠)했던 어느 선생님께 번거로운 부탁을 드려 죄송하다고 말씀드리자 조금도 그렇게 생각하지 말라고, 또 필요한 일 있으면 아무 걱정 말고 얘기하라고 진심을 다해 말씀해 주신 일도 나는 잊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남편. 사회생활 경험이 매우 풍부한 남편의 눈엔 이번에 내가 겪은 상황이 그리 위중한 사태가 아니며 결국 다 잘 해결될 것이라는 게 처음부터 보였을 것이다. 그런데도 남편은 날마다 나의 장황한 이야기를 집중해서 들어 주고 내 불안과 긴장을 이해해 주었다. 괜찮고 괜찮고 다 괜찮다는 그 눈빛, 그 표정에서 나는 뜨끈뜨끈한 온기를 쬐었다. 차갑고 버석대던 불안과 긴장은 이제 눈 녹듯 녹아 사라졌지만 남편이 내게 준 따뜻한 안도감은 계속해서 나를 따라다닌다.
시간이 흐르면 내가 어떤 업무 처리를 놓쳤고 그 일이 어떻게 해결됐는지는 차츰 잊게 될 것이다. 하지만 그 며칠간 마음고생이 심한 만큼 어느 때보다 절실히 다가오던 고마움, 그리고 그 고마운 이들에게서 배운 자세들은 내 삶, 내 근육의 일부가 되어 앞으로 타인과의 관계 속에 순간순간 배어날 것이다. 그러다 언젠가 나도 모르게 내놓은 내 어떤 눈빛이나 말, 또는 몸짓이 마음고생 중인 누군가에게 요긴한 위안이 된다면, 이는 또 얼마나 다행스런 일이겠는가. 바로 이런 좋은 이유로, 이 일은 내게 왔던 것이다. 바로 이런 좋은 이유로, 우리는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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