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년이 넘어도 폰을 바꾸지 않고(잃어버리지 않고, 부수지 않고) 잘 쓰던 나였다. 그런 내가 1년간 사용하던 폰을 네 번 바꿨다. 하나는 재작년 여자친구와 연말 여행 중에 보도블럭 위에 떨어뜨렸는데 떨어진 각도와 세기가 매우 적당하여 액정이 산산조각 났다. 바꾸지 않고 몇 개월을 꿋꿋이 쓰다가 작년 가을이 되어서야 새로운 폰을 샀다. 그런데 얼마안가 연말 모임에서 잃어버렸다. 예전에 쓰던, 이제는 골동품이 된 손바닥 크기만한 핸드폰을 다시 서랍장에서 꺼내들었다.
세상의 외피는 5년 전에 비해 더 높은 아파트들이 스카이라인을 침범하고, 산업단지와 개별입지로 들어선 공장들이 농지를 침범하고, 세련된 곡면을 가진 자동차들이 좀 더 늘었고, 사람들의 표정은 읽을 수 없는 무언가가 된 것 같았으나 큰 변화는 없었다. 이전의 추세가 심화되고 있는 느낌이었다. 그러나 사이버 세계는 그간 지각변동이 있었나보다. 아무리 오래된 자동차라도 도로를 통해 이것 저곳을 다닐 수 있지만, 5년전 핸드폰은 사이버 세계를 원활하게 돌아다닐 수 없었다. 사이버 시계는 세대를 거듭 통과하였고 나의 핸드폰은 임종을 앞두고 유언을 겨우 내뱉는 노인이 되었다. 통화와 문자만 아슬아슬하게 할 수 있었다.
날 불쌍히 여긴 동지 한 분이 아내가 쓰던 폰을 하나 구해주었다. 그 폰은 시외버스에서 잠들었다가 청주 북부정류소에 막 도착한 것을 알고 급히 내리다가 놓고 내렸다. 버스에서 종종 폰을 두고 내리는 일이 있다보니 사업소에 직접 전화해서 폰을 되찾곤 했는데, 이번에는 왜인지 내가 앉았던 좌석 주변을 살펴도 보이지 않는다고 기사님이 일러주었다. 그리고 여자친구 동생이 알려준 중고폰 사이트를 통해 폰 하나를 샀다. 하루를 마감하는 어느 밤. 그 날과 평화롭게 결별하기 위해 잠자리에 누워서 여자친구에게 전화를 걸었다. 여자친구는 목소리가 잘 들리지 않는다고 하여 나는 앉았다. 그래도 안 들린다고 하여 일어서서 통화했다.
그 폰은 신호가 잘 안 잡혔다. 과학적인 원인을 아직 파악하지는 못했으나 폰이 놓인 고도에 따라 신호의 세기가 달랐다. 누워있을 때는 신호가 잡히지 않고, 앉으면 조금 잡히고 일어서면 신호가 잘 잡혔다. 편하게 누워서 통화하다가 상대가 안 들린다고 짜증내면, 나도 짜증내면서 앉았다가, 또 짜증스럽게 일어서서 전화하는 일이 잦았다. 시발. 시발. 꽃(!)같네. 입에서 욕이 절로 나왔다. 중고폰을 사야했던 빈곤한 통장과, 상대의 불만에 날카롭게 대응하는 옹졸함과, 어떻게든 기계에 의존하여 살아야하는 나약함을 한 솥에 넣고 끓이면 지랄탕이 나온다. 나는 여자친구와 이 지랄탕을 나눠 먹고, 뒤집어 엎고, 싸우는 동안 봄이 왔다.
이제 이 폰 마저 손에서 미끄러져 바닥을 뒹군 다음에는 터치가 잘 안 된다. 이 원고를 쓰기 위해 스타벅스 2층에 올라왔다. 글이 잘 써지지 않아 테이블을 옮기는 동안 블루투스 키보드를 떨어뜨려 백스페이스 버튼이 떨어져 나갔다. 혼자서 글 쓰고 싶다고 같이 카페에 온 여자친구에게 1층에 내려가달라고 얘기했는데 그 얘기하는 방식에 대한 문제제기를 받았다. 엿 같고 지랄 같은 날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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