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소식지/마음거울

<제96호> 빈소에 찾은 조문객처럼

by 사람이 되어 숨을 쉬었다. 2020. 4. 28.

 

 

 

안녕하신지요. 슬픔이 많은 계절입니다만 흐드러지게 피어 있는 꽃들 덕에 소생할 기운을 얻고 있습니다. 꽃들이 겨울의 추위와 여름의 더위 사이에서 자신의 시간들을 남김없이 써버리는 것처럼, 저 역시 제게 주어진 시간들을 허투루 쓰지 않고 남김없이 쓰리라 생각합니다. 제 앞에 놓여진 비단향꽃무는 우울한 저를 위해 사랑하는 이가 선물해준 것인데, 그 꽃을 전해주는 그녀의 얼굴빛이 저에게는 구원이었습니다. 그 꽃은 그녀를 닮아 꽃잎이 풍성하고 향이 멀리 퍼지고 생명력이 강했습니다.

 

그녀와 다투고 난 후에 화병에 놓인 꽃을 발견했습니다. 어느새 줄기 끝 물관이 막혀서 꽃은 꽤 말라있었습니다. 꽃을 살짝 건드리니 보라색 꽃잎들이 우수수 떨어졌습니다. 그녀에게 미안한 마음이 커졌습니다. 꽃잎들은 시들기보다는 그 모양 그대로 말라있었습니다. 줄기 끝을 사선으로 자르고 물을 갈았습니다. 남은 꽃잎들에게 수분이 잘 전달되기를 바라면서요. 며칠 뒤엔 화병에서 꺼내어 빨래건조대에 거꾸로 매달아 빨래집게로 집어놨습니다. 하루 이틀 말리니 훌륭한 드라이플라워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지금은 물 없는 화병에 예쁘고 고운 자태로 남아있습니다. 비단향꽃무도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을 남김없이 쓰고 있는 셈이겠군요.

 

마리아 라이너 릴케가 쓴 젊은 시인에게 보내는 편지중 슬픔과 고독에 관한 글이 생각나는 요즘입니다. 지난 토요일 오후 간만에 비가 시원하게 내리는 풍경을 바라보며 한가로이 카페에 앉아있었습니다, 슬픔인지 분노인지 모를 뜨거운 것들이 머리를 달구고 있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었습니다. 세찬 비가 몰아치고 천둥이 울렸습니다. 카페 안의 공기가 서늘해지고, 굵은 빗방울로 사방이 뒤덮였습니다. 저는 이참에 뜨거운 모든 것들이 식어지기를 기도했습니다. 슬픔이 지나간 뒤에는, 슬픔이 오롯이 나를 관통하도록 힘껏 받아들인 뒤에는 조금 달라져있을 것입니다.

 

슬퍼할 수밖에요. 슬픔은 나쁜 감정이 아니잖아요. 어쩌면 슬픔은 가장 정직한 감정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결혼식보다 장례식을 좋아한다는 시인 할아버지 다니카와 슌타로가 생각나는군요. 어쩌면 빈소에 찾아간 조문객처럼 행동거지를 조심하고, 말을 감추고, 몸을 느리게 할 시절인 것 같습니다. 주변에 셀 수 없이 많은 이들이 비참하게 죽었고, 지금도 죽어가고 있습니다. 인간 외에 다른 동물들도 서식지를 잃고, 도시에 나와 차에 치여 죽었습니다. 전염병 확산을 막는다는 이유로 돼지와 닭들은 산 채로 땅에 묻혔습니다. 우리가 슬픔을 제대로 겪어낸다면 세상은 조금 달라져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슬픔을 외면한 적이 참 많습니다. 그 덕에 밀린 숙제를 한가득 쌓아놓고 여기에 앉아 있습니다. 슬픔은 어둡고 습하고 동굴처럼 길어 보입니다. 시각이 아닌 다른 감각들을 예민하게 만들어줍니다. 동굴에서 나왔을 땐 좀 더 달리 보일 거라 생각합니다. 하지 말아야 할 일이 분명해지고, 지켜야할 것들이 드러날 거라고 생각합니다. 글을 쓰는 동안 눈이 조금 맑아진 기분입니다. 오늘은 시간을 덜 빼앗길 수 있겠습니다.

 

많이 아프시다고 들었습니다. 부디 저의 편지가 아픔에 머무르고 있는 선생님께 힘이 되길 바랍니다. 그럼 이만 줄이겠습니다. 평온하시길.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