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왜 그랬는지 모르겠다. 날이 좋았던 어느 날 오후 산책하다가 부동산엘 들렀다. 새로운 전셋집이나 알아볼 요량이었다. 부동산 여주인은 요즘 전세가 없다며 좋은 아파트가 싸게 나온 게 있는데 사는 게 어떠냐고 권했다. 우리 형편에 맞지 않는 턱없이 넓은 평수 아파트였다. 나는 그냥 보기만 하는 건데 뭐 어때 하는 마음으로 구경했다. 참 좋았다. 조망도 좋았고, 햇살 가득한 아파트 실내가 그럴싸했다. 조금만 무리하면 우리도 이렇게 좋은 집에서 살 수 있지 않을까 싶은 마음이 확 솟구쳤다. 엄청 싸게 나온 거라며 빨리 결정할수록 좋다는 말에 출장 간 남편 핑계를 대며 집으로 돌아왔다. 그날 밤 나는 이리저리 몸을 뒤척이며 잠들지 못했다. 내 마음은 벌써 그 아파트에 살림살이를 들여놓을 궁리로 가득 찼기 때문이다. 출장에서 돌아온 남편에게 아파트를 보고 왔노라고, 우리도 이제 집을 사야하지 않느냐고 말했다. 남편은 내 얘기를 듣더니 헛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수희씨 정신 좀 차리시지…”
그즈음 남편이 읽는 책이 <노후파산>이었다. 남편은 내게 참 무서운 이야기라고 나도 꼭 봤으면 하는 책이라고 여러 번 말했다. 처음엔 관심도 없었던 <노후파산>을 집어 들었다. 왠지 그래야 할 것만 같았다. <노후파산>은 NHK 스페셜 제작팀에서 만든 방송 <노후파산>을 책으로 엮어냈다. 이 책은 쉽게 읽히지만 내용은 정말 악몽 그 자체다. 우리에게 머지않아 다가올 현실이기에 그렇다. 노후파산이란 의식주 모든 면에서 자립능력을 상실한 노인의 비참한 삶을 의미한다고 한다. 이 책의 영향 때문인지 ‘노후파산’ 이라는 용어가 최근 우리사회에서도 중요한 키워드로 꼽히고 있다는 보도도 나왔다. 이 책은 노후파산에 처한 노인들의 삶을 다각도로 보여준다. 그런데 막연하게 생각해왔던 아니 보편적으로 노후하면 떠올렸던 모습들은 이 책에서 전혀 찾아볼 수 없다. 직장에서 정년퇴임하고 넓은 마당이 있는 집이나 시골에서 전원생활을 만끽하며 연금을 받아 생활하며 손주들 재롱이나 보면서 건강을 돌보고 취미생활을 하는 노후 생활은 이제 정말 꿈에서나 가능한 일이라는 걸 알게 해준다. 노후파산에 처한 노인들이 특별한 사람들은 아니다. 평생 놀거나 저축이나 연금이 없는 이들이 아니다. 그저 평범한 인생을 살아왔으며, 집도 있고, 저축도 있고 연금도 있는 그런 이들이다. 그런데 왜 그런 이들이 노후파산에 처하게 된 것일까. 그들도 말한다. 성실하게 살아왔는데, 열심히 일했는데 노후파산을 맞이할 줄 몰랐노라고.
이 책 <노후파산>은 연금만으로 생활해야 해서 하루 한 끼만 먹고 사는 노인, 죽을병이 아니고 그저 몸을 움직일 수만 있다면 아무리 아파도 병원을 가지 않는 노인들, 고급 주택가에 살면서도 전기조차 쓰지 못하는 노인, 자신이 받는 연금으로 실업자인 나이 많은 자식까지 부양해야 하는 노인들의 삶을 통해 노후파산 위기를 사실적으로 보여준다. 노후파산 위기에 몰린 노인들은 경제적 문제뿐만 아니라 사회적으로도 고립되어 고통을 받는다. 홀로 죽어가게 될까봐 두려워하면서도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해 차라리 빨리 죽는 게 낫다고 생각한다. 예금을 다 써버리게 될까봐 불안하고 가난하니 사람들과 교류할 수 없게 돼 더 외로워지니 건강을 지켜내기도 쉽지 않다. 큰 병에 걸려 몸이 움직이지 않게 되는 순간 노후파산은 시작된다. 안심하고 살 수 있는 노후 생활은 돈에 달려있지만 충분히 부담할 수 있을 만큼 여유 있는 고령자는 적은 게 현실이라고 노후파산은 평범한 이들 누구에게나 올 수 있다는 걸 말해준다.
<노후파산>에서는 노후파산에 처한 노인들이 생활보호를 받을 권리를 제대로 누려야 한다고 강조한다. 일본 헌법 25조는 건강하고 문화적인 최저한도의 생활을 보장해야 한다고 나와 있단다. 최저한도보다 적은 수입일 경우 생활보호를 받는 것은 국민에게 보장된 권리란다. 생활보호는 생활비만이 아니라 의료와 돌봄 서비스를 무상으로 보장하고 공영주택으로 이주할 수 있게 되고 무엇보다 사회와 연결되어 살아갈 힘을 되찾을 수 있다고 말한다.
선진국인 일본, 노후 정책이 비교적 잘 돼 있다고 하는 일본에서 벌어지는 이 현실이 전혀 남 얘기라고 할 수 없는 게 바로 우리 현실 아닌가?! 우리사회가 그리 살만한 사회도 아니질 않나. 홀로 늙다가 홀로 죽거나 시설이나 요양원에서 죽어가는 수많은 이들이 있다. 이것이 내 미래는 아니라고 과연 장담할 수 있을까. 돈이 인생의 전부라고 말할 순 없지만 살려면 돈은 필요하다. 그런데 일자리는 마땅치 않은 게 현실이다. 정규직을 없애고 더 쉽게 해고할 수 있게끔 하지 못해 안달난 세상이다. 누구에게나 찾아올 수 있는 노후파산, 대책이 필요하다. 인간답게 살아갈 수 있게 사회적인 안전망이 절실하다. 각자도생을 강요받는 사회가 아니라 좀 살만한 사회였으면 좋겠다.
전세자금을 대출받아 이리저리 옮겨 다니며 이제 겨우 빚을 다 갚았지만 저축도 많지 않아 집을 사려면 또 다시 대출을 받아야 하는 형편에 좋은 아파트 운운했으니 나도 참 …. 또 다시 출장 간 남편이 내 앞으로 책을 보내왔다. <아파트 제대로 고르는 법>이다. 이런 종류에 책을 내켜하지 않는데 노후파산에 대처하기 위해서라도 봐야 하나 어쩌야 하나 고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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