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소식지/수희씨와 책읽기(종료)

<105호> 세상에 지지 않고 앞으로 한 발 더 나아가는 법_이수희(충북민주언론시민연합 사무국장, 회원)

by 사람이 되어 숨을 쉬었다. 2021. 1. 27.

 

"어떤 자살은 가해였다. 아주 최종적인 가해였다“, 박원순 전 서울시장의 성추행과 자살, 그리고 이어진 2차 가해 당시 곳곳에서 이 문장을 인용하는 글을 봤다. 유명한 시의 문구도 아니고 한낱 소설의 문구인데 이토록 많은 사람들이 이 문장을 인용하는 것이 너무나 놀라웠다. 인용이 전부가 아니었다. 2030 세대 여성들은 이 문장이 담긴 정세랑의 소설 <시선으로부터,>를 구매해 피해자와 연대하는 움직임도 보여줬다.

 

정세랑? 나는 처음 듣는 이름이었다. 대체 어떤 책일까 궁금했다. <시선으로부터,>라는 책도 혹시 피해자의 이야기를 다룬 건가 궁금했다. 궁금했지만 바로 읽지는 못했다. 그 사이 넷플릭스에서 <보건교사 안은영>을 봤고, 여기저기 예능에 출연한 정세랑 소설가를 유튜브에서 짤로 봤다. 밀레니얼 세대의 대표적 소설가라는 정세랑 작가의 <시선으로부터,>를 이제야 읽었다.

 

<시선으로부터,>는 심시선의 제사를 하와이에서 지내려는 심시선 가계의 3대가 그려내는 이야기다. 왜 하와이냐고? 심시선은 한때 하와이에서 살았기 때문이다. 심시선의 사후 10주년을 맞아 그녀의 큰 딸은 하와이에서 제사를 지내자고 제안한다. 하와이에 모인 가족들은 저마다 자신이 기억하는 심시선을 떠올린다. 훌라춤을 배우고, 서핑을 배우고, 미술관을 드나들고, 팬케익 가게를 들르며 심시선의 삶이 자신들에게 얼마나 이어져 있는지를 보여준다.

 

소설 속 각장마다 심시선의 글들이 먼저 등장한다. 심시선은 화가이지만 글쓰기를 더 중요하게 생각한 모양이다. 일기에서부터 축사까지 심시선의 생생한 육성을 듣는 듯하다. 심시선의 글은 그가 얼마나 꿋꿋하고 멋있는 사람인지, 어떻게 폭력을 견뎌냈는지를 담담히 보여준다. 심시선은 하와이에서 우연히 유명한 화가 마티아스 마우어를 만났고 교육 기회를 주겠다는 그의 제안을 받아들인다. 그러나 마티아스의 제안은 순수한 제안이 아니었나보다. 마티아스는 자신을 여행의 수집품처럼 여겼다고 심시선은 말한다. 심시선은 후회했다. 경험 부족에서 비롯한 잘못된 판단으로 유명하고 힘 있는 남자의 손에 떨어진 여러 여성 중 한명이었다고. 급기야 마티아스는 심시선에게 폭력을 휘두르고 끝내 자살을 선택해 심시선을 가해자로 만든다. 세상은 심시선을 재능 있는 화가를 파멸로 몰아넣은 아시아의 마녀로 바라본다. 그러나 심시선은 이를 악물며 앞으로 나아간다. 간절히 원하던 학위도 따내고 자신의 그림을 제대로 평가해주는 친구도 만나고 쓸쓸함을 위로해 준 사람도 만났다. 두 번의 결혼을 했고, 하와이에 모두 모여 그녀를 추억할 만큼 끈끈한 가족들을 남겼다. “심시선과 관련된 한번은 시리즈를 몇 개씩 가지고 있어 게임처럼 밤새 되풀이 할 수 있을 정도로심시선은 그들의 삶 속에 살아 있는 듯하다.

 

심시선이 낳은 두 딸, 그리고 두 번째 남편의 딸, 그리고 며느리와 손녀들도 모두 그녀를 온전히 이해하고 있는 듯 보인다. 심시선이 그렇게 살아서 일까? 모두 기세 좋게 자신의 삶에 당당히 맞서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소설 앞 부분에서 심시선의 큰 딸 명혜의 딸인 화수는 할머니 그림을 보면서 말한다. 매일 한 시간 씩 바라보고 있어도 매번 새로운 부분을 발견할 수 있는 대단한 그림인데도 불구하고 어린 시절 할머니 보다 누군가의 부인이란 설명이 먼저 오는 것에 아연함을 느꼈다며 지난 세기 여성들의 마음엔 절벽의 풍경이 하나씩 있었을 거라는 생각을 최근에 하게 됐다고, 날마다 모멸감을 어떻게 견뎠느냐고 묻고 싶었다고, 어떻게 가슴이 터져 죽지 않고 웃으면서 일흔아홉까지 살 수 있었느냐고 죽은 할머니를 깨워 묻고 싶다고 말이다. 이 물음에 대해 내가 찾은 답은 소설 마지막장에 나온 심시선의 글이다. 심시선은 말한다. “나는 이제 그만 말해야겠습니다. 내게 오는 말할 기회를 이제 젊은 사라에게 주십시오. 어차피 세상에 대해 할 말은 다했고, 앞으로의 세상은 내가 살아갈 세상이 아닐 테니 내 의견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나 다음 사람이 또 나처럼 화살을 맞고 싸움에 휘말리고 끝없이 오해받을 걸 생각하면 아득하지만 말할 수 있는 사람이 해야 합니다.”

 

작가는 혹독한 지난 세기를 누볐던 여성 예술가가 죽지 않고 끈질기게 살아남아 일가를 이루었다면 어땠을지 상상해보고 싶었다고 밝혔다. 이 소설은 20세기를 살아낸 여자들에게 바치는 21세기의 사랑이라는 말도 남겼다. 심시선의 말처럼 이제 앞으로의 세상을 살아갈 사람들이 더 말해야 한다. 매일같이 절벽을 마주하는 상황에 처한 이들이 자신의 목소리를 낼 때, 세상에 지지 않고 꿋꿋이 버티어나갈 때 달라질 수 있을테니까. 시선으로부터,에서 또 세상사는 법을 배운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