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8호> 그대에게 보내는 단어 여섯 번째_잔디(允)
척박한 땅에 심었던 씨감자가 자라 이제, 남편과 함께 만삭의 몸으로 쭈그리고 앉아 캐고, 옮기고 감자를 수확하던 어머니는 밭에서의 고된 하루 일과를 다 마치고, 저녁도 다 해서 드시고, 설거지까지 하고나서 그 밤, 저를 낳았다고 하셨어요. 장마 지기 전에 감자를 다 캐고 나서 네가 태어났어. 참 착한 딸이지. 스무 살 즈음까지, ‘착한’이란 단어에 기대어 혹은 빠져나올 생각조차 없이, 아무런 의심 없이, 하고 싶은 말 지나보내고, 마음속으로 들어온 말 고스란히 쌓으며, 조용히 착하게 지내려고 했어요. 힘겹게 사느라 마음 아픈 엄마가 내가 던진 말에 마음 아파서 깨져 버릴까봐 담고, 누르고, 담고, 참고, 누르고... 그때는 그렇게 하고 있는지도 몰랐어요. 시간이 흐르고 살아가는 것이 점점 더 힘들기도 하..
2020. 7. 28.
<제97호> 그대에게 보내는 단어. 다섯 번째_잔디(允)
시간의 강을 타고 유유히 흐르고 있는 우리. 여기까지 흘러, 小滿(소만)이라는 절기에 닿아 제법 우거진 초록 사이에서 하얀(흰) 꽃을 봅니다. 올해엔 특히, 쪽동백나무가 틔워낸 하얀 꽃이 제 마음에 앉았습니다. 이제 와 생각해 보니, ‘하얀’이 아기의 순수성에 가깝다고 하면, ‘흰’은 삶의 각각의 지점에서 배움을 꿈꾸며 삶을 살아낸 사람이 낼 수 있는 순수에서 뿜어 나오는 고결함 같아요. 빈 논에 물을 담고, 그 흙을 갈고, 곱게 펴고, 어린 모를 심는 사람들을 오가며 봅니다. 기계로 모를 심은 후 한 줄 한 줄 모를 이어주는, 발과 다리가 푹푹 빠지는 무논에서, 허리 구부리고, 홀로 일하시는 분들. 배추밭에서, 혹은 사과밭에서, 부지런한 동작이지만, 고요히 흐트러짐 없이 움직이시는 어른들을 오가며 뵈면..
2020. 7. 28.
<제96호> 그대에게 보내는 단어. 네 번째._잔디(允)
길쭉한 마당 곁에 모과나무 한 그루가 자라고 있습니다. 그의 초록 잎새가 아가의 앙증맞은 걸음마처럼 피어납니다. 곧 그 초록과 어울리는 어여쁜 꽃을 피워 제 마음을 두드리겠지요. 숲 속 여기저기에서 꽃망울을 띄우는 것은 산벚나무입니다. 나무마다 다른 꽃빛깔로 피어나는 모습을 보려, 유심히, 마음 주고 눈길 주어 보게 됩니다. 어느 동안은 저는, 나무가 되고 싶었어요. 나무처럼 한 자리에 서있는 그런 사람요. 그 꿈은 여전합니다. 한 자리에 줄기와 닮은 뿌리 내리고 서서 햇빛 받으며, 계절과 시간을 견디면서도 흐르는, 싹 틔움과 성장, 상실을 반복하는 존재. 가지 끝의 생명을 기르면서도, 자신도 자라는 것을, 오직, 햇빛과 하늘이 주는 물과 땅의 기운을 받아 그 과정을 반복하는 그런, 존재. 그 간결함으로..
2020. 4. 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