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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식지/산 위에서 부는 바람

<제96호> 그대에게 보내는 단어. 네 번째._잔디(允)

by 사람이 되어 숨을 쉬었다. 2020. 4. 28.

 

길쭉한 마당 곁에 모과나무 한 그루가 자라고 있습니다. 그의 초록 잎새가 아가의 앙증맞은 걸음마처럼 피어납니다. 곧 그 초록과 어울리는 어여쁜 꽃을 피워 제 마음을 두드리겠지요. 숲 속 여기저기에서 꽃망울을 띄우는 것은 산벚나무입니다. 나무마다 다른 꽃빛깔로 피어나는 모습을 보려, 유심히, 마음 주고 눈길 주어 보게 됩니다. 어느 동안은 저는, 나무가 되고 싶었어요. 나무처럼 한 자리에 서있는 그런 사람요. 그 꿈은 여전합니다. 한 자리에 줄기와 닮은 뿌리 내리고 서서 햇빛 받으며, 계절과 시간을 견디면서도 흐르는, 싹 틔움과 성장, 상실을 반복하는 존재. 가지 끝의 생명을 기르면서도, 자신도 자라는 것을, 오직, 햇빛과 하늘이 주는 물과 땅의 기운을 받아 그 과정을 반복하는 그런, 존재. 그 간결함으로도 반짝이는 맑은 초록 잎을 내며 하늘 향해 한껏 햇살에 젖는...

육안으로는 볼 수도 없는 아주 작은 벌레에도 쓰러지고, 두려워하는 연약한 몸을 가진 존재가 인류라는 것을 공부하고 있는 지금, 이제 서로가 함께 어떻게 연대하며 살아갈 것인지를 인류가 고민하고 그것에 마음을 쓰면 좋을 시간... 인류의 움직임이 감소하니, 자연이 본래의 빛깔을 회복하는 풍경이 주는 의미를 깨닫고, 유지하고, 서로에게 기대어 있음을 기억해내면 좋을 시간... 나비의 가벼운 날갯짓 같은 나의 몸짓과 생각이 멀리 혹은 가까이 있는 타자에게 미치는 일에 대해 가만히 들여다보는 그런 시간이기를... 그래서, 어느 시민은, ‘미사일 대신 마스크, 전투기 대신 식량을이라고 간절히 이야기했겠지 싶어요. 먹을 수도, 나눌 수도 없는 무기(그것이 미사일이든 나의 이익만을 남기려는 생각이든)를 내려놓고, 꽃밭으로 손 맞잡고 걸어갈 수 있는 지혜를 함께 모으는 것이 당신과 나의 일이기를 바라는 시간...

 

달리기

초등학교 다닐 때(그때는 초등학교...^^) 운동회 하는 날이 정말 무서웠다. 아프고 싶은 날이었다. 다섯 명이 나란히 서면, 100미터 달리기 출발신호로 선생님이 손을 높이 들고 쏘던 그 총소리도, 그 소리가 무서워 귀 막고 눈 감고 있다가서는, 달리기 속도도 느린데, 늦게 출발하여, 늦게 들어갈 수밖에 없었던 그 결승선도, 좋아하던 짝꿍에게 내가 늦게 달리는 모습을 보여주던 그 순간도, 보라색 도장 받지 못해 저 뒤에 가서 줄서는 그 순간도... 빨갛게 부끄러웠던 그 마음. 기억한다. 아직도.

 

다시마

까닭 없이 손톱이 부서질 때, 손바닥만 하게 자른 다시마 한 조각을 씻은 쌀 위에 함께 넣어 압력솥에 넣어 밥을 안친다. 밥은 짭조름하니 맛나며, 쫄깃하고, 밥 위에서 걷어낸 다시마는 한 김 나간 뒤 먹으면 씹는 맛이 나며, 손톱이 단단해지고, 빈혈에도 좋다니, 일타쌍피~!

 

두통

약 안 먹고 버티던 때가 있었다. 요즘은 한 알 먹거나 백회를 두드려주거나 한다. 오랜 친구라서 헤어지지 못하지만, 때론 괴로워서, 헤어지고 싶다. 아파본 것도 경험이라고 두통이 있다고 말하는 사람을 그냥, 지나칠 수가 없다. 뜨끈한 물 한 잔 가득 담아 두 손바닥으로 컵을 감싸쥐고 있어보시라고 건넨다. 그리하고 있으면, 신묘한 효과가 있다.

 

다락

내가 여섯 살 때, 할머니가 아직 인천으로 이사 가지 않고, 가까운 마을에 사실 때, 외할머니는 할머니 키만큼이나 자그마한 다락에서 사탕이며, 곶감, 연필 한 자루를 꺼내주곤 하셨다. 동네에서 다정다감한 산파이셨던 할머니는 정작 울 엄마가 나를 낳을 때에는, 어딘가로 사라지셔서 엄마는 조산소에서 나를 낳으셨다는 이야기를 할머니에 대한 야속함으로 말씀하신다. 할머니는 하늘다락에서 편안히 계실지... 지금, 사다리를 여섯 계단 올라가 닿는 우리집 다락방에는 책이며, 커다란 방석, 자판 두드리는 소리와 아이들의 소곤거림이 쌓이고 있다. 도란도란, 티격태격...

 

폐계를 여러 마리 데려와 기르다, 3년 정도 살아남아 함께 지내던 닭 한 마리가 있었다. 마침내는 말을 알아듣는 강아지처럼, 이리오라고 하면 오고, 저리가라하면 가고, 눈을 마주치던... 오랫동안 함께 지내면 서로를 말없이 바라보게 된다는 걸 가르쳐다 돌아간... 그몸집만한 강아지에게 물려, 돌무덤을 만들어 주었다.

 

달고나

국자에 누런 설탕을 듬뿍 담아, 안방 아궁이 앞에 앉아, 젓가락으로 둘둘 저어, 녹여서는 적당한 때에 소다를 한 꼬집 넣고, 휘휘 저어, 거품이 보글보글 올라올 때, 접시에 폭하고 한 번에 쏟는다. 약간 기다렸다가 누름개로 눌러 쿠키모양틀로 찍어, 뽑기를 하다, 부서질까봐 그냥 다 입에 넣는다. 옆에서 함께 쭈그리고 앉아 설탕을 녹이던 아이는 엄마, 초등학교 다닐 때, 친구들이랑 많이 해 보았지?” 묻지만, 50원이 없어서, 아쉬움을 품고, 뽑기 아저씨 좌판을 지나쳐가던 그때 생각... 그 기억이 까만 슬픈 기억일지라도, 웃으면서 아스라한 그 곳을 지나왔음을 말할 수 있다. 더 이상 아프지 않게.

 

닻과 닻밥

함민복 시인은 이렇게 썼다. 결국 배위에서 출렁이는 뱃사람들의 삶을 잡고 있는 닻은 멀리 보이는 갯마을의 작은 집들일 것이다, 라고. 그리고 물속 땅으로 물위 배의 흔들림을 전달하고 있는 닻줄. 배가 심하게 흔들릴수록 물살이 셀수록 닻은 더 깊이 땅에 박힌다. 사람들 기억 속에 박히는 상처처럼. 상처의 힘. 상처의 사랑, 이라고 썼다. 내가 배이든, 네가 닻이든, 내가 닻밥이든, 어느 땐 네가 나의 닻이고, 닻밥이든... 우리 함께 걷고 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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