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것들.
잔디
하루 이틀 사이에 개구리 소리가 밤공기를 가득 채운 것처럼 들린다. 아침에는 서늘하다가 오전이 되면 덥고 오후엔 땀이 나다가 밤엔 다시 서늘해지는 그런 날들의 연속. 지구의 기후가 이상하다고 하여도 개구리는 개구리의 때에 소리를 내고, 작약은 작약의 때에 피어나고 지고, 어느새 상추는 부지런히 뜯어먹고도 넘쳐서 어쩔 수 없이 나누어 먹어야 하는 신세가 되었다. 상추의 작은 잎을 뜯을 때는 정말 소중히 부드러운 손길로 뜯고, 정말 귀한 걸 먹듯 소중히 먹었는데, 이제는 이걸 어떻게 다 먹지? 겁내며 밭에 가는 지경에 이르렀다.
소만(小滿)이라고 그래서 달력을 들여다보며 소만이라는 한자를 자세히 보니 ‘작은 것들이 세상을 꽉 채운다’는 뜻이라고 그러고보니 정말 사람이건 자연이건 작은 것들이 어느새 자라 세상을 꽉 채우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 기숙사에 가 있는 딸아이에게 아침 인사를 ‘소만 인사’로 건넸다. “지구 안에서 작은 것들이 세상을 꽉 채운다는 생각이 들어. 우리 안에 어떤 작은 것이 우리를 채우고 있을까? 생각하며 하루를 지내보고 싶다. 호기심으로 나를 보며, 너를 보며, 주변을 보며... 소만이니까.”라고.
아버지의 밭에는 그리고 엄마의 밭에는 실파가 자라고 있었다. 쪽파는 어느새 무르익어 줄기를 눕히고 씨앗을 튼실히 하는 자세로 누워있었고, 나란히 줄지어 서 있는 실파 줄과 실파 줄 사이에는 족두리꽃 싹이 군데군데 자라고 있었다. 실파 사이에 난 작은 풀들을 아버지는 엉덩이 의자에 앉아 섬세한 손동작으로 뽑고 있었다. 풀을 뽑다가 파 모종은 냈냐고 물으시더니 내가 아니에요, 라는 대답도 하기 전에 파를 솎아내고 계셨다. 여전히 섬세한 손동작으로. 아버지의 파를 모시고 와서 아직 밭 모양새를 갖추지 못한 것처럼 보이는 엉성한 나의 밭에 파를 심었다. 아버지가 가르쳐주신 대로 밭 가장자리에도 심고 양파 밭에 양파가 나지 않은 구멍에도 한 구멍에 두 개씩, 세 개씩 심었다. 아버지가 주신 조선파를 심었다. 밭 가장자리에 서서 겨울을 날 조선파를 심었다. 내가 파를 잊어도 파는 거기서 지워지지 않고, 풀을 이기고 잘 살아있기를 바라는 마음은 욕심일까? 하는 생각도 하며.
사실 나는 마을 어르신들의 밭을 지날 때 겨울을 나고 초록으로 서있는 그 밭이 부러웠다.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보이는 겨울의 밭에서 뿌리로 견디어 다른 풀들이 아직 싹을 틔우기 전부터 조금씩 자라 우뚝 서 있는 파의 행렬. 어쩌면 다음 해 봄에도 파는 거기에서 자라날 것을 믿고, 시금치 씨도 뿌리고, 쪽파 씨도 흙 속에 심어두고, 파도 남겨두는 어르신들의 감각을 부러워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엄지와 검지를 한껏 편 길이만큼 자란 쪽파를 우리 마을의 애자 언니가 한 움큼 뽑아 주셨을 때에도 나는 계절을 아는 애자 언니가, 언니의 손이 부러웠다. 서울 어디에서 태어나 줄곧 서울에서 살던 언니가 농사를 전혀 모르던 언니가 시금치를 심어 팔고, 쪽파를 가꾸어 팔고, 튼실한 마늘을 키워내는 기술을 가지기까지의 시간을 나는 알지 못한다. 다만 지금의 애자 언니의 쪽파밭과 마늘밭과 조금 구부러진 언니의 허리와 출퇴근할 때 우연히 보게 되는 언니의 뒷모습을 볼 수 있을 뿐이다. 내가 지금 듣고 있는 새소리가 언니의 밭에서도 들려 언니가 새소리를 들으며 허리를 쭉~ 한 번 펴기를 바라는 마음.
봄이 오고 꽃이 피고 꽃이 지는 걸 한두 해 보아온 것이 아닌데 올해 봄에는 산벚나무꽃보다 유심히 바라보게 된 꽃이 있다. 오동나무꽃. 생태계를 해친다고도 하는데, 올해는 초록빛과 어우러진 우아한 연보라빛의 그 꽃을 등나무꽃인가? 하며 매일 빙그레 웃으며 언제부터 저 꽃이 저기 있었지? 지난해 봄에도 이와 비슷한 생각을 하다 남편에게 그 꽃이 무슨 꽃인지 묻고 아, 오동나무꽃이라고 말하고 동료에게도 그 우아한 보랏빛의 꽃을 보았냐고 오동나무꽃이더라고 전하며 웃었는데. 내년에도 또 그러려나? 왜 기억하지 못하느냐고 내 안의 목소리가 나를 다그치지 않아서 좋았다. 그럴 수도 있지... 아마 내년에는 기억하지 않을까? 라는 막연한 기대, 작은 것들이 나에게 다가와서 들려주는 이야기를 다음 해 또 듣게 되더라도 새로 듣는 이야기처럼 들을 수 있는 호기심을 바라게 되는 마음을 내어보는 오늘.
작은 존재들의 현명한 선택을 바라게 되는 지금. 작은 존재들의 삶으로 지금까지 이어져 온 사람의 역사를 무겁지 않게 그저 계절의 순환처럼 자연스럽게 여기는 지금. 자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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