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가는 모습을 지켜보는 즐거움
박윤준(음성노동인권센터 상담실장)
해인을 양육하면서 인생에서 처음 느껴보는 감정들이 있다. 감정이란 얼마나 풍부한 세계인가. 미움, 슬픔, 짜증, 분노, 기쁨, 즐거움, 아쉬움, 우울, 무서움, 불안, 설렘, 뭉클함, 대견함, 고마움, 존경스러움, 질투, 배신감, 사랑… 수많은 감정의 낱말들이 있지만 우리는 그 단어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감정들을 느끼며 살아간다.
22개월의 해인은 하루가 다르게 쑥쑥 자라나고 있다. 키, 몸무게는 정체되어 있는 반면, 인지, 교감, 언어, 신체 능력 면에서 커가는 것이 눈에 보일 정도다. 예전에는 낱말 카드나 그림책에서 같이 읽었던 단어 몇 개를 따라했다면, 요즘에는 출처 불명의 말들을 내 앞에서 쏟아냈다. “반딱 반딱 쟈근 별 아듬답께 비치네~” 어린이집에서 들은 노래들을 집에서 혼자 놀면서 흥얼댄다.
요즘 해인의 언어 세계는 엄마 아빠에게 요구하는 말들로 가득 채워지고 있다. 아빠 일어나, 아빠 나가, 킥보~드, 킥보~드, 엄마 맘마, 엄마 맨밥 주데요.(주세요) 빵! 빵! 안아, 안아, 안아줘. 요구를 받아주지 않으면 벌러덩 드러눕는다. 내가 이 장면을 보고야 마는구나!
어느 날은 해인을 뒷좌석 카시트에 태우고 운전을 하는데 해인이 이쪽! 이쪽! 하며 손가락으로 방향을 가리켰다. 차를 오른쪽으로 돌리라는 얘기였다. 그러더니 주차! 주차! 이랬다. ‘얘가 갑자기 왜 그러지?’ 신기하면서도 이상했다. 해인은 멈추지 않았다. 운전에 방해가 될 정도로 뒤에서 이쪽! 저쪽! 지시를 해대서 혼을 냈다. 나중에 미진과 대화를 하다가 아이가 뒤에서 그런 행동을 보인 이유를 찾았다.
며칠 전 해인을 뒤에 태운 채로 운전면허 시험을 앞둔 아내의 운전 연습을 봐준 적이 있었다. 아내가 사람이 없는 빈 주차장을 한 바퀴 천천히 운전하였는데, 조수석에 앉은 내가 “이쪽, 이쪽” 하며 진입 방향을 말하면 아내가 내가 지시한 방향으로 차를 움직였다. 해인이 그날의 나와 아내 사이의 상호작용을 그대로 받아들였던 것이었다.
오늘 저녁에는 해인이가 엄마 품에 안겨서 식탁을 가운데 두고 나와 마주 앉았다. 아내와 내가 식사를 막 마치고 나서 이런저런 대화를 하고 있었다. 대화를 하며 내가 왼쪽 팔꿈치를 식탁 위에 올리고 오른손은 턱에 괴자, 해인이가 그대로 날 따라하며 흥미로운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리고서는 말을 나에게 건네듯이 외계어를 내게 쏟아냈다. 저녁 식사에서도 엄마 아빠를 오가며 상추를 얼마나 야무지게 싸주던지. 그 작은 손으로 상추를 접고 또 접어서 입에다 가져다주는데 그렇게 기특할 수가 없었다.
한 명의 어린 인간이 커가는 모습을 가까이서 맨살을 부대끼며 매일 보는 일은 정말 놀라운 경험인 것 같다. 해인의 영유아 시기에는 내 기억에서는 사라진 나의 영유아기를 간접 체험하며 내 양육자들의 수고와 헌신을 상상하곤 했다. 해인에게 나를 투영하던 시기였다. 요즘은 유일무이한 존재로서 세상을 경험하고, 자라나고 있는 아이의 모습을 지켜보고, 개입하는 부모의 위치에 내가 들어섰다는 걸 새삼스럽게 깨닫는다. 아이가 자신의 자아를 형성하고, 부모와 자신이 별개의 독립적인 존재임을 깨닫는 것처럼.
해인을 만나기 전까지는 인생에서 ‘나’의 문제가 꽤나 큰 비중을 차지했던 것 같다. 20대 초중반, 경제적 자립을 하기 전에는 더없이 불안했고, 나의 불안을 끌어안는 것만으로도 벅찬 시기였다. 먹고 살 직업을 구하고, 나이가 들고, 파트너를 만나면서 많은 불안들이 해소되었고, 이후에는 활동가로서 내가 속한 조직과 함께 잘 성장하고자 하는 욕구가 많았던 것 같다. 하지만 해인을 키우면서는 내가 아닌 다른 존재가 잘 자라길 진심으로 바라게 되었고, 상대적으로 ‘나’에게서 비롯된 문제들에 대해서는 무뎌지고 있는 것 같다. 그저 행복한 순간들이 당신과 나의 삶에 많아지길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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