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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식지/산 위에서 부는 바람

다정한 목록

by 인권연대 숨 2026. 9. 28.
다정한 목록

 

잔디

 

 퇴근하면서 동네 단골 슈퍼에서 약간의 장을 보았다. 추석 연휴 바로 전날 퇴근하면서 장을 다 보기엔 빠뜨리는 것이 있을 수도 있고, 빠뜨린 것을 채우기엔 또 긴박하여 마음이 지나치게 바빠질 수 있으니깐 나름 나를 위한 배려를 한 조각 이루었다. 집에 돌아와 장 본 것을 저녁 설거지를 하기 전에 싱그러운 쪽파의 뿌리를 자르고 질기거나 시들한 부분을 벗겨내어 쪽파를 다듬고 신문지에 둘둘 말아 냉장고에 넣는다. 아직 씻기엔 이른 시기이다. 동그란 육전을 할 다짐육을 밑간을 해서 통에 넣어 김치냉장고 빈칸에 넣고, 설거지를 하고 잔디 광장으로 달려간다. 물론 슬로우조깅이다. 달리기가 아닌 것도 같고, 달리기인 것 같기도 한 그 달리기를 하며 3킬로미터를 채우고 집으로 돌아온다. 씻고, 하루를 정리하거나 아침의 필사를 완성하려고 다이어리를 펼친다. 아, 마감... 마감은 늘 빨리 다가오고, 마감은 실상 느린 속도로 내 마음을 통과하고 있다. 쓰려고 했던 첫 문장들은 나를 지나 어디로 간 것일까? 다시 나에게 돌아오기를 기다리지만, 첫 문장들은 매정하게 나를 지나쳐 가서 가만히 앉아 기다려도 돌아오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다가올 새로운 첫 문장을 하루종일 기다린다. 물론 마감일을 지난 다음 날에도 그다음 날에도. 예전에 내가 나에게 주었던 압박은 없지만, 첫 문장을 내가 압박하는 형국이 된 지는 오래 되었다. 오늘은 하늘의 구름이 첫 문장일까? 점심시간에 내 짧은 뒷머리카락을 지나간 바람이 첫 문장일까? 회사 동료의 손바닥 위에 아침 인사로 올려놓은, 하트를 제 몸에 새긴 풍선초 씨앗이 첫 문장일까? 마주 앉아 있는 아이의 웃음이 첫 문장일까? 이리저리 서성이다 결국 오늘 찍은 노을 사진을 상주슈퍼 정육코너에서 소고기를 썰고 있는 언니에게 보여드리면서도 쪽파를 찾고 있는, 나의 마음이 첫 문장이겠다 싶었다.

해마다 때가 되면 명절 장을 보면서도 며칠 전부터 무엇을 살까? 식구들과 무엇을 해 먹으면 맛있을까? 이리저리 궁리하다 결국 적어 놓은 장보기 목록은 지난 설의 목록과 그리 다르지 않은 단어들이 목록을 채우고 있다. 마치 매일 별로 다르지 않은 단어들로 일상을 채우지만, 매일 다른 일상들이 나를 지나가는 것처럼. 결혼 이후 지나온 명절을 노을 보듯 바라보면서 이런저런 생각이 든다. 그 생각 중 주된 생각은 그간 마음운동을 꾸준히 노력해 온 나는 어디에 서 있지? 명절마다 되풀이하는 장보기 목록처럼 명절마다 되풀이하게 되는 대화들, 그 대화속에서 생겨나는 나의 생각들. 그래서 밖으로 뱉게 되는 나의 말들. 매일 매일의 어떤 마음 작업 속에서 생각과 말 사이의 틈을 발견하고 그 틈새를 넓히려고 하는 나의 노력들이 허무하게 여겨지는 날들이 허다하지만, 명절 때에는 더 그런 허무함들이 반복되곤 한다. 내가 어쩔 수 없는, 혹은 내 것이 아닌 것이 내 안에 불쑥 들어와서 - 장보기 목록처럼 작성한 것도 아니고, 내가 의도를 가지고 그쪽을 향해 서 있거나 노력한 것도 아닌데 - 벌써 어떤 생각에 발끝이 젖어 있는 나를 본다. 저 습기는 점점 나를 잠식할까? 하는 생각을 발견한다. 발견은 행운이다. 발견하는 나와 함께 있고자 하는 것은 귀엽고 다정한 할머니가 되고 싶은 나의 꿈과 맞닿아 있는 것은 아닐까? 귀엽고 다정한 할머니의 전형은 무겁지 않음과 유머와 따뜻함일 거라고 생각한다. 인류가 따뜻함 혹은 다정함의 역사를 그리워하며 살아왔고, 인류역사의 부분이 전쟁으로 물들어가는 그 아픈 시간에도 역사를 이끌어 온 것은 전쟁의 상처를 쓰다듬고, 상처를 보듬고 낫게 하려는 손길이고 인류의 역사는 그 손길의 총합이라고 생각할 때, 나 자신과 그리고 나의 상대들과 함께 나누고 싶은 것도 다정함.

 

장보기 목록에서 아직 구입하지 않은 것을 내일 퇴근하면서 장을 볼 것이다. 장보기 목록에 적혀 있진 않지만, 만나면 짧은 이야기 속에서 하루를 마무리하는 말, 오늘도 애썼다고 하는 말, 언니는 하루종일 물건을 들었다 놨다 했으니 지금은 허리를 구부리지 마소, 제가 들을게요 라는 사소한 말 속에 담긴 다정함으로 장을 볼 것이다. 우린 그 사소한 다정함을 마음에 기록하고 그 에너지로 하루하루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그래서 장보기 목록에 잘 보이도록 꾹꾹 눌러 적어본다. 다 정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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