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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현경11

<제91호> 결코 쓸모없지 않을 거라고_박현경(교사) 결혼 전, 남편과 함께 살기로 마음먹었을 때 한 가지 걱정이 된 건 고양이였다. 이 사람과 같이 산다는 건 그와 수년째 함께 지내 온 고양이 ‘왕순이’랑도 한 식구가 되는 것을 의미했다. 이 털북숭이 생명체는 아마도 나의 고요를 흐트러뜨릴 거야. 매일 아침 짧게라도 명상하는 시간이 내겐 반드시 필요한데, 차분히 그림 그리고 책 읽고 글 쓰는 시간이 너무나 소중한데, 남편은 이런 나를 잘 이해하고 배려해 주지만, 말이 통하지 않는 고양이는? 고양이가 부산스럽게 굴어서 더 이상 명상도, 그림도, 책 읽기도, 글쓰기도 제대로 못하게 되면 어쩌지? 내 소중한 고요를 침해당할까 봐 두려웠다. 왕순이랑 함께 지낸 지 4년 반이 넘은 지금에 와서 생각하면 정말이지 공연한 걱정이었다. 내 옆이나 무릎 위에 앉아 갸르릉.. 2019. 12. 11.
<제90호> 힘_박현경(교사) 후두둑, 후두두둑. 빗방울을 흩뿌리는 하늘이 야속했다. 우산 없이 집을 나선 아침. 여느 때처럼 등에는 백팩, 어깨엔 도시락 가방을 메고 걷는 출근길. 빗방울은 점점 굵어져 빗줄기로 변했고 나는 꼼짝없이 비를 맞으며 걸었다. 비를 피할 곳도 마땅치 않았거니와, 혹시 그럴 장소가 있다 해도 비가 그치길 기다리다가는 학교에 늦을 수 있기 때문이다. 도착할 즈음이면 머리고 옷이고 양말이고 다 흠뻑 젖어 있을 텐데, 처량한 꼴로 1교시 수업에 들어가게 됐다고 속으로 투덜대며 조금이라도 덜 젖기 위해 발걸음을 재촉했다. 승용차들이 한 대 두 대 빠르게 나를 스쳐 지나갈 때마다 내 모습이 더 처량하게 느껴졌다. 그러던 중 갑자기 뒤통수 너머에서 들려오는 “화작 쌤!” 하는 소리. (‘화작 쌤’이란 ‘화법과 작문’ .. 2019. 12. 11.
<제89호> 그렇게 그 집과 화해를 했다_박현경(교사) 그 집은 오랫동안 나의 콤플렉스였다. 부모님이 사랑과 정성을 다해 가꾸신 보금자리였고 엄마, 아빠, 언니, 나, 네 식구가 오손도손 일상을 일구는 소중한 터전이었건만, 나는 우리 집이 창피했다. 군산시 문화동, 언제나 바닥에 물기가 흥건한 재래시장 안 골목, 부모님이 운영하시던 조그만 속옷 가게 앞 빈 점포, 그 내부를 살림집으로 개조하고 시멘트 블록으로 2층을 올린 집. 그 집은 볕이 거의 들지 않고 습기가 많아 곰팡이가 잘 생겼고, 그래서 엄마는 하루에도 몇 번씩 방을 닦고 또 닦으셨다. 여름엔 찜통, 겨울엔 냉골이었다. 하지만 우린 그 집에서 하루하루 행복하게 지냈다. 책도 많이 읽고 그림도 그리고 공부도 열심히 했다. 같은 골목에 살던 유릿집 아이, 빵집 아이, 떡집 아이 들이랑 어울려 노는 것도.. 2019. 10. 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