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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경이랑세상읽기15

다시 만난 세계 다시 만난 세계박현경(화가, 교사) 토요일 아침, 잠에서 깨어 뜨거운 커피 한 잔 들고 2층 작업실로 간다. 가로 2미터, 세로 1미터 30센티미터의 수채화용지가 작업대에 펼쳐져 있다. 한 달 넘게 진행 중인 작업. 천사의 붉고 커다란 날개 한쪽이 반쯤 채색돼 있다. 얼기설기 쌓인 액자들 틈바구니에서 잠을 자던 고양이 봉순이가 깨어 야옹댄다. 핸드폰에 블루투스 오디오를 연결하고 음악을 켠다. 빌리어코스티의 ‘소란했던 시절에’가 작업실 안에 잔잔히 깔리고 나는 크레용을 집어 천사의 날개 채색을 이어 간다. 그렇게 아침 7시 반부터 10시 반까지 세 시간이 훌쩍 흘러, 운동하러 갔던 남편이 집에 돌아오면 둘이서 맥도날드에 간다. 나는 슈슈버거 세트, 남편은 빅맥 세트. 천천히 먹고 마시며 일주일간 밀린 .. 2025. 4. 25.
삼월소회(三月所懷) 삼월소회(三月所懷)박현경(화가, 교사) 1. 가장 소중한 것을 지키기 위해 가장 소중한 것을 일상은 소중하다. 그중에서도 퇴근 후 시간과 주말은 특히. 출근의 목적은 퇴근이다. 퇴근과 함께 진짜 삶이 시작된다. 주말은 우리 삶의 에센스, 즉 정수(精髓)다.작년 12월 3일 이후 대한민국의 수많은 시민들이 퇴근 후의 ‘진짜 삶’, 주말이라는 ‘삶의 정수’를 광장에 바치고 있다. 자신에게 가장 소중한 것을 바쳐 광장의 시간을 일구고 있는 것이다. 그 이유는 역설적이게도 바로 그 ‘가장 소중한 것’을 지키기 위해서다. 가장 소중한 것을 지키기 위해 가장 소중한 것을 바친다. 일상을 지키기 위해 일상을 바친다. 계엄이 성공했다면 모두의 일상이 처절하게 그리고 총체적으로 망가지고 짓밟혔을 것이며 우리가 깜박하는 .. 2025. 3. 25.
나는 끝까지 나를 나는 끝까지 나를박현경 (화가, 교사) 이삿짐을 싼다는 건 힘든 일이다. 물건 하나하나를 집을 때마다 거기 깃든 추억이 몰려들기 때문이다. 일요일인 오늘, 관사 퇴거 작업을 했다. 2023년 7월 1일부터 현재까지 약 1년 8개월 동안 월, 화, 수, 목, 금요일을 지낸 방이다. 먹고 자고 고민하고 그림 그리던 이 공간에서 나의 흔적을 지워 내는 건 시간도 힘도 많이 드는 일이었다. 여행 온 것처럼 단출히 지내리라 마음먹었었는데 그동안 쌓인 책이며 옷이 왜 이리 많은지……. 책을 한 권 들어 올릴 때마다 그 책을 사던 날의 기분, 그 책을 읽다가 했던 전화 통화 따위가 자꾸만 떠올랐다. 옷을 한 벌 집어 들 때마다 그 옷을 입고 누구를 만나 어떤 이야기를 나눴는지, 그때 내가 그 사람을 사랑했는지 미워했.. 2025. 2. 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