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년 전 캐나다로 떠난 <지순 선생님>. 점자도서관에서 녹음봉사를 하던 중 만난 분이다. 어느 날인가 저녁식사를 대접하고 싶다며 집으로 초대를 하셨다. 돼지고기 김치찌개로 차린 저녁상을 앞에 놓고 들려준 이야기. 부군과 아들을 먼저 캐나다로 보내고 기러기엄마 생활을 하던 차, 이제 함께 지내고 싶어 떠난다 하셨다. 10년 쯤 그곳에서 살아보고 고향으로 돌아올 생각이라며 당신이 한국에 돌아오면, 따뜻한 봄날 도시락 싸서 함께 소풍을 가자 하셨다. 며칠 전, 메일이 한통 날아왔다. 지순 선생님이 한국에 들어왔단 소식이다. 알려주신 휴대폰으로 전화를 걸었다.
“선생님, 이영희에요.” 잠깐 침묵이 흐른다. “죄송합니다만, 이영희씨가 누구지요?” 녹음봉사 하던 이영희라고 하니 그제야 “아, 희야님 이름이 이영희였구나.” 하신다. 소식을 전할 때 늘 <지순>과 <희야>로 끝을 맺었으니 이름 석 자가 낯선 게 당연했다. 선생님은 석 달 휴가를 받아 한국에 들어왔는데, 어쩌다 보니 그 기간 동안 초등학교 기간제교사를 맡게 되었다며 떠나기 전 꼭 만나고 싶다 하신다. 2월에 선생님 고향 강릉과 청주 중간인 원주에서 만나기로 약속했다. 선생님이 떠날 때는 다시 만날 수 있을까 싶었는데 살다보니 또 그렇게 만나지게 된다. 녹음봉사라는 게 작은 녹음실에 들어가 혼자하는 작업이라 봉사자끼리 만날 기회가 많지 않다. 나 또한 선생님과 차 한 잔 나눈 것이 서너 번이나 될까. 그런데도 이렇게 긴 시간 인연이 이어지다니 참 신기하다. 8년만의 만남. 무슨 이야기를 할까, 점심은 무엇으로 먹을까... 소풍을 기다리는 아이처럼 그렇게 흥분이 되었다.
그러다 문득 생각난 <순옥 언니>. 경주에서 <동화읽는 어른> 모임을 만들고 회원을 모집하던 때였다. 이런 모임을 정말 기다렸다며 함께 하고 싶다고 기대에 잔뜩 부풀어 전화를 걸던 언니의 목소리가 지금도 생생하다. 그렇게 맺어진 인연이 깊어지며 친자매처럼 가까이 지내게 되었다. 몸살이 나서 누워 있으면 약을 사가지고 와서는 집안 청소며 설거지까지도 다 해주고 가는 언니였다. 그런 언니가 2002년이 끝날 무렵 아이들을 데리고 캐나다로 떠났다. 이듬해 나는 아이 셋을 데리고 캐나다에서 한 달을 머물게 되었다. 말도 잘 안 통하고 친구도 없어 외롭다며 다녀가라는 언니의 부탁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국땅에서 혼자 아들 둘을 데리고 지내자니 언니의 스트레스도 말이 아니었을 텐데, 나잇값도 못했던 나는 언니에게 짐만 되고 온 것 같아 다녀온 뒤 내내 마음이 무거웠다. 미안한 마음에 전처럼 소식도 자주 전하지 못하고 세월을 보내다 어느 순간 기억 저편으로 잊혀졌는데, 선생님과의 통화로 갑자기 떠오른 것이다. 미안함과 그리움을 가득 담아 언니에게 편지를 썼다. <메일 휴면상태>라는 메시지가 떴다. 순간 가슴이 쿵 내려앉았다. 언니를 잊은 게 아니었다. 내 마음 속에는 따뜻했던 언니와의 추억이 한가득이다. 그러나 나와 언니를 이어주는 유일한 고리인 이메일이 끊어지니 정말 언니와의 인연이 다 된 건가 싶어 눈물이 났다. 언니도 사는 동안 어느 날인가 내가 생각날까.
<시절인연>이 되어 만났던 사람, <시절인연>이 다 되어 헤어진 사람. 그렇게 만나고 헤어진 사람이 내게 얼마나 많았을까? 가까이 있어도 고마운 줄 모르고, 늘 곁에 있다 생각했는데 어느 순간 사라져버린 누군가에 대해 생각해 본다. 이제는 지난 시간에 대한 후회나 미안함을 갖지 않기로 한다. 꼭 그래야 한다. 시절인연으로 만나고 헤어지는 우리 삶. 그 안에서 서로에게 최선을 다하자.
어디서든 잘 지내시길, 건강하시길, 그리고 행복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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