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식지/마음거울93 슬픔이 기쁨에게 슬픔이 기쁨에게 정호승 나는 이제 너에게도 슬픔을 주겠다.사랑보다 소중한 슬픔을 주겠다.겨울밤 거리에서 귤 몇 개 놓고살아온 추위와 떨고 있는 할머니에게귤값을 깎으면서 기뻐하던 너를 위하여나는 슬픔의 평등한 얼굴을 보여 주겠다.내가 어둠 속에서 너를 부를 때단 한 번도 평등하게 웃어 주질 않은가마니에 덮인 동사자가 다시 얼어 죽을 때가나미 한 장조차 덮어 주지 않은무관심한 너의 사랑을 위해흘릴 줄 모르는 너의 눈물을 위해나는 이제 너에게도 기다림을 주겠다.이 세상에 내리던 함박눈을 멈추겠다.보리밭에 내리던 봄눈들을 데리고추위 떠는 사람들의 슬픔에게 다녀와서눈 그친 눈길을 너와 함께 걷겠다.슬픔의 힘에 대한 이야기를 하며기다림의 슬픔까지 걸어가겠다. - 슬픔이 기쁨에게(창비, 1979) 2024. 5. 27. 새로 돋는 풀잎들에 부쳐 새로 돋는 풀잎들에 부쳐 이영광 되어야 할 일이 있다면 네가 작아지는 일네가 작아지고 작아져서 세상이 깜짝 놀라고여기에, 생략처럼 아찔한 것이 있구나없는 줄 알았구나하얗게 조심스러워지는 것작아지고 작아져서 네가 부는 바람에도아직 불어오지 않은 바람에도 철없이 흔들려지워져버릴 것 같아서용약(勇躍) 큰 걸음들이 그만 서버리고없음인 줄 알았구나숨 멈추는 일되어야 할 일이 있다면, 단 하나인 네가 막무가내로여럿이 되는 일황야의 연록 홑이불,골목의 이글대는 거웃이 되는 일없음이란 것이 무수히 생길 뻔했구나없음을 목격할 뻔했던 가슴들이도처에서 막힌 숨을 토하고여기에, 생략처럼 무시무시한 것들이 있었구나있음이란 것이 정말 있구나종아리만 하고 허벅지만 한 나무로 멈추는 일백 년 이백 년 된 아름드리나무들로 함께 걷.. 2024. 4. 25. 헛것을 따라다니다 헛것을 따라다니다 김형영 나는 내가 누군지 모르고 산다. 내가 꽃인데 꽃을 찾아다니는가 하면, 내가 바람인데 한 발짝도 나를 떠나지 못하고 스스로 울안에 갇혀 산다. 내가 만물과 함께 주인인데 이리 기웃 저리 기웃 한평생도 모자란 듯 기웃거리다가 나를 바로 보지 못하고 나는 나를 떠나 떠돌아다닌다. 내가 나무이고 내가 꽃이고 내가 향기인데 끝내 나는 내가 누군지 모르고 헛것을 따라다니다 그만 헛것이 되어 떠돌아다닌다. 나 없는 내가 되어 떠돌아다닌다. - 땅을 여는 꽃들(문학과 지성사, 2014) 2024. 3. 26. 이전 1 2 3 4 5 6 ··· 31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