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식지/마음거울93 가을폭포 - 정호승 가을폭포 정호승 술을 마셨으면 이제 잔을 놓고 가을폭포로 가라 가을폭포는 낙엽이 질 때마다 점점 더 깊은 산 속으로 걸어 들어가 외로운 산새의 주검 곁에 누워 한 점 첫눈이 되기를 기다리나니 술이 취했으면 이제 잔을 놓고 일어나 가을폭포로 가라 우리의 가슴속으로 흐르던 맑은 물소리는 어느덧 끊어지고 삿대질을 하며 서로의 인생을 욕하는 소리만 어지럽게 흘러가 마음이 가난한 물고기 한 마리 폭포의 물줄기를 박차고 튀어나와 푸른 하늘 위에 퍼덕이나니 술이 취했으면 이제 잔을 놓고 가을폭포로 가서 몸을 던져라 곧은 폭포의 물줄기도 가늘게 굽었다 휘어진다 휘어져 굽은 폭포가 더 아름다운 밤 초승달도 가을폭포에 걸리었다 - 외로우니까 사람이다(창비, 2021) 2023. 8. 25. 나의 소원 - 정호승 나의 소원 정호승 내가 죽기 전에 꼭 한번 해보고 싶은 일은 철도 기관사가 되는 일이다 서울역에서 승객이 가득 탄 기차를 몰고 멀리 여수나 목포로 떠나는 일이다 신의주로 양강도 백두산으로 떠나는 일이다 내가 가지 않으면 안 되는 언젠가 꼭 한번은 가보고 죽어야 하는 인간의 진리의 길을 향해 침목을 깔고 나만의 선로를 놓아 세상 사람들 모두 잠든 새벽에 기관실에 높이 앉아 바다를 향해 달리는 일이다 차창을 스치는 갈매기와 섬들에게 손을 흔들고 바다에 내린 승객들로 하여금 수평선 위를 하루 종일 산책하게 하는 일이다 무인도에도 잠시 머물러 인생의 썰물과 밀물을 오랫동안 바라보게 하고 어느 봄날에 다시 기차를 몰고 평양을 지나 백두산역을 향해 달리는 일이다 백두산이 보이는 기관실에 높이 앉아 천지의 깊고 고요.. 2023. 7. 25. 거대한 뿌리 - 김수영 거대한 뿌리 김수영 나는 아직도 앉는 법을 모른다 어쩌다 셋이서 술을 마신다 둘은 한 발을 무릎 위에 얹고 도사리지 않는다 나는 어느새 남쪽식으로 도사리고 앉았다 그럴 때는 이 둘은 반드시 이북 친구들이기 때문에 나는 나의 앉음새를 고친다 8.15후에 김병욱이란 시인은 두 발을 뒤로 꼬고 언제나 일본여자처럼 앉아서 변론을 일삼았지만 그는 일본대학에 다니면서 4년 동안을 제철회사에서 노동을 한 강자다 나는 이사벨 버드 비숍여사와 연애하고 있다 그녀는 1893년에 조선을 처음 방문한 영국 왕립지학협회 회원이다 그녀는 인경전의 종소리가 울리면 장안의 남자들이 모조리 사라지고 갑자기 부녀자의 세계로 화하는 극적인 서울을 보았다 이 아름다운 시간에는 남자로서 거리를 무단통행할 수 있는 것은 교군꾼, 내시, 외국인.. 2023. 6. 26. 이전 1 ··· 3 4 5 6 7 8 9 ··· 31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