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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식지/마음거울97

화염경배 화염경배 이면우 보일러 새벽 가동 중 화염투시구로 연소실을 본다 고맙다 저 불길, 참 오래 날 먹여 살렸다 밥, 돼지고기, 공납금이 다 저기서 나왔다 녹차의 쓸쓸함도 따라나왔다 내 가족의 웃음, 눈물이 저 불길 속에 함께 타올랐다. 불길 속에서, 마술처럼 음식을 끄집어 내는 여자를 경배하듯 나는 불길처럼 일찍 붉은 마음을 들어 바쳤다 불길과 여자는 함께 뜨겁고 서늘하다 나는 나지막히 말을 건넨다 그래, 지금처럼 나와 가족을 지켜다오 때가 되면 육신을 들어 네게 바치겠다. - 아무도 울지 않는 밤은 없다(창비 2001) 2023. 12. 26.
바람의 가닥 바람의 가닥 박홍규 한꺼번에 몰려오는 바람 뭉치라 해도 색깔이 가닥가닥 똑같지 않다는 사실을 어느 도시 좁고 냄새나는 거리를 지나왔는지 무슨 계절의 강물을 하루 중 어느 때의 들판을 만나고 왔는지 숲을 통과했다면 무슨 나무 어느 나뭇잎을 거쳐 왔는지 들여다보면 바람 갈피 갈피마다 제각각 묻어 있는 속사정 있기 마련이지만 분명한 건 어디서 무슨 색에 물들어 불어오든 닿는 바람 한 올 한 올마다 나를 흔들어 대고 별수 없이 그때마다 나는 흔들린다는 사실을 그러니 왜 나는 흔들리는지부터 도대체 몇 가닥이 뭉쳐 게다가 끊이지 않고 들이닥치는지 그 중 어느 서늘함에 나는 더 휘청이는지까지 궁리 끝에 알아낸다 해도 여전히 흔들리지 않을 수 없다는 사실을 - 나무보다 구름(고두미, 2023) 2023. 11. 27.
고요에 헹구지 않으면 고요에 헹구지 않으면 백무산 이른 아침 난데없이 꽃밭에 꽃이 흐드러진 건 내 탓이다 식전부터 앞뒤 다니며 쿵쿵거렸고 내 불면을 화풀이하느라 툴툴 바람을 울렸고 제 빛깔 다 머금기 전에 고요가 몸에 다 무르익기 전에 파르르 놀라 드러낸 건 꽃이 아니라 공포였다. 씨앗은 자신을 떠나 고요를 통과해야 자신을 불러낼 수 있기에, 누구나 깊은 잠을 자야 하는 이유는 몸을 떠난 고요를 불러들일 수 있기에, 잠은 하루치 노동을 지우고 고요를 불러들일 수 있기에, 해가 뜨면 내일이 되는 것이 아니라 육즙 빠져 쭈그렁바가지가 된 시간이 고요에 무르익어야 내일이 뜨기에, 시간을 고요에 헹구지 않으면 오늘을 반복할 뿐 내일의 다른 시간이 뜨지 않기에 - 거대한 일상(창비, 2008) 2023. 10. 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