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식지/마음거울93 바람의 가닥 바람의 가닥 박홍규 한꺼번에 몰려오는 바람 뭉치라 해도 색깔이 가닥가닥 똑같지 않다는 사실을 어느 도시 좁고 냄새나는 거리를 지나왔는지 무슨 계절의 강물을 하루 중 어느 때의 들판을 만나고 왔는지 숲을 통과했다면 무슨 나무 어느 나뭇잎을 거쳐 왔는지 들여다보면 바람 갈피 갈피마다 제각각 묻어 있는 속사정 있기 마련이지만 분명한 건 어디서 무슨 색에 물들어 불어오든 닿는 바람 한 올 한 올마다 나를 흔들어 대고 별수 없이 그때마다 나는 흔들린다는 사실을 그러니 왜 나는 흔들리는지부터 도대체 몇 가닥이 뭉쳐 게다가 끊이지 않고 들이닥치는지 그 중 어느 서늘함에 나는 더 휘청이는지까지 궁리 끝에 알아낸다 해도 여전히 흔들리지 않을 수 없다는 사실을 - 나무보다 구름(고두미, 2023) 2023. 11. 27. 고요에 헹구지 않으면 고요에 헹구지 않으면 백무산 이른 아침 난데없이 꽃밭에 꽃이 흐드러진 건 내 탓이다 식전부터 앞뒤 다니며 쿵쿵거렸고 내 불면을 화풀이하느라 툴툴 바람을 울렸고 제 빛깔 다 머금기 전에 고요가 몸에 다 무르익기 전에 파르르 놀라 드러낸 건 꽃이 아니라 공포였다. 씨앗은 자신을 떠나 고요를 통과해야 자신을 불러낼 수 있기에, 누구나 깊은 잠을 자야 하는 이유는 몸을 떠난 고요를 불러들일 수 있기에, 잠은 하루치 노동을 지우고 고요를 불러들일 수 있기에, 해가 뜨면 내일이 되는 것이 아니라 육즙 빠져 쭈그렁바가지가 된 시간이 고요에 무르익어야 내일이 뜨기에, 시간을 고요에 헹구지 않으면 오늘을 반복할 뿐 내일의 다른 시간이 뜨지 않기에 - 거대한 일상(창비, 2008) 2023. 10. 25. 오늘의 달력 - 유현아 오늘의 달력 유현아 어제의 꿈을 오늘도 꾸었다 아무도 위로할 수 없는 절망의 바닥을 보았다 바닥 밑에 희망이 우글우글 숨어 있을 거라고 거짓말했다 한장을 넘겨보아도 똑같은 달의 연속이었다 못 하는 게 없는 것보다 어쨌거나 버티는 게 중요했다 바닥 밑에 바닥, 바닥 밑에 바닥이 있을 뿐이라고 그럼에도 우리는 바닥에 미세한 금들이 소용돌이치는 것을 보았다 바닥의 목소리가 뛰어올라 공중에서 사라질때까지 당신의 박수 소리가 하늘 끝에서 별처럼 빛날 때까지 오늘도 달력을 넘기는 것이다 우리에게 일어나는 슬픔은 겨우 손톱만큼의 조각 당신의 애인에게서 내일의 꿈을 들었다 - 슬픔은 겨우 손톱만큼의 조각(창비, 2023) 2023. 9. 25. 이전 1 2 3 4 5 6 7 8 ··· 31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