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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식지/마음거울98

꽃을 보는 법 꽃을 보는 법  복효근  꽃이 지고 나면 그뿐인 시절이 있었다꽃이 시들면 바로 쓰레기통에 버리던 시절나는 그렇게 무례했다 모란이 지고 나서 꽃 진 자리를 보다가 알았다꽃잎이 떨어진 자리에 다섯 개의 씨앗이솟아오르더니 왕관 모양이 되었다화중왕이라는 말은꽃잎을 두고 한 말이 아니었던 것이다모란꽃은 그렇게 지고 난 다음까지가 꽃이었다 백합이 지고 나서 보았다나팔 모양의 꽃잎이 지고 수술도 말라 떨어지고나서 암술 하나가 길게 뻗어 달려있다꽃가루가 씨방에 도달할 때까지 암술 혼자서긴 긴 날을 매달려 꽃의 생을 살고 있었다 꽃은 그러니까 진 다음까지 꽃이다꽃은 모양과 빛깔과 향기만으로 규정되지 않는다사람과 사랑이 그러하지 않다면어찌 사람과 사랑을 꽃이라 하랴 생도 사랑도 지고 난 다음까지가 꽃이다    - 고요한 .. 2024. 7. 26.
가장 위험한 동물 가장 위험한 동물 이산하  몇년 전 유럽여행 때어느 실내동물원을 구경했다.방문마다 사슴, 늑대, 사자, 악어 같은동물들의 이름이 새겨져 있었다.마지막 방문에는‘세상에서 가장 위험한 동물’이라고깊이 새겨져 있었다.호기심에 얼른 문을 열었다.그런데 방은 텅 비어 있었고 정면 벽에커다란 거울 하나가 걸려 있었다.내 얼굴이 크게 비쳤다.    - 악의 평범성(창비, 2021) 2024. 6. 25.
슬픔이 기쁨에게 슬픔이 기쁨에게  정호승   나는 이제 너에게도 슬픔을 주겠다.사랑보다 소중한 슬픔을 주겠다.겨울밤 거리에서 귤 몇 개 놓고살아온 추위와 떨고 있는 할머니에게귤값을 깎으면서 기뻐하던 너를 위하여나는 슬픔의 평등한 얼굴을 보여 주겠다.내가 어둠 속에서 너를 부를 때단 한 번도 평등하게 웃어 주질 않은가마니에 덮인 동사자가 다시 얼어 죽을 때가나미 한 장조차 덮어 주지 않은무관심한 너의 사랑을 위해흘릴 줄 모르는 너의 눈물을 위해나는 이제 너에게도 기다림을 주겠다.이 세상에 내리던 함박눈을 멈추겠다.보리밭에 내리던 봄눈들을 데리고추위 떠는 사람들의 슬픔에게 다녀와서눈 그친 눈길을 너와 함께 걷겠다.슬픔의 힘에 대한 이야기를 하며기다림의 슬픔까지 걸어가겠다.    - 슬픔이 기쁨에게(창비, 1979) 2024. 5. 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