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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식지/마음거울93

밑번들 밑번들 송경동 믿지 말아야 할 말이 있다 ‘이번에는 정말’이라는 말 정치인과 지식인과 전문가들, 그리고 시도 때도 없이 얼뜬 복음주의자 영웅주의자들이 잘 쓰는 말이다 이번에는 고치겠다 이번에는 진짜 바꾸겠다 이번에는 정말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확실히 엄정히 뿌리 끝까지 결단코 조치하겠다 ...저번에 모두 쫓아냈어야 할 사람들이다 이번 사람들은 저번과는 최소한 다른 사람들이어야 했다 4월도 5월도 6월도 7,8,9도 껍데기만 남은 저번 분들은 이제 그만 가고 속 허한 밑번들 끝번들만 남아라 - 내일 다시 쓰겠습니다(아시아,2023) 2024. 2. 26.
야훼님전 상서 야훼님전 상서 고정희 야훼님 한 사나이가 집으로 돌아 왔습니다 오랜 추위와 각고를 끝낸 사나이가 집으로 돌아 왔습니다 아주 멀리 떠날 줄 알았던 그, 이제는 다시 돌아 올 수 없는 곳으로 가버린 줄 알았던 그 사나이는 누더기 옷을 걸치고 섬광 같은 눈빛을 간직한 채 그의 기원을 묻어둔 집으로 돌아 왔습니다 그가 돌아 왔을 때 영원히 닫긴 줄 알았던 기도의 문이 열리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그가 돌아 왔을 때 영원히 끝난 줄 알았던 자유의 휘파람 소리가 들판을 가로질러 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가 돌아 왔을 때 우리들 기다림이 불기둥으로 일어서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야훼님 그가 돌아온 마을과 지붕은 아직 어둡습니다. 그가 돌아온 교회당과 십자가는 더더욱 고독합니다. 그가 돌아온 들판과 전답은 이 무지막지한 .. 2024. 1. 26.
화염경배 화염경배 이면우 보일러 새벽 가동 중 화염투시구로 연소실을 본다 고맙다 저 불길, 참 오래 날 먹여 살렸다 밥, 돼지고기, 공납금이 다 저기서 나왔다 녹차의 쓸쓸함도 따라나왔다 내 가족의 웃음, 눈물이 저 불길 속에 함께 타올랐다. 불길 속에서, 마술처럼 음식을 끄집어 내는 여자를 경배하듯 나는 불길처럼 일찍 붉은 마음을 들어 바쳤다 불길과 여자는 함께 뜨겁고 서늘하다 나는 나지막히 말을 건넨다 그래, 지금처럼 나와 가족을 지켜다오 때가 되면 육신을 들어 네게 바치겠다. - 아무도 울지 않는 밤은 없다(창비 2001) 2023. 12. 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