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식지/마음거울97 오늘의 달력 - 유현아 오늘의 달력 유현아 어제의 꿈을 오늘도 꾸었다 아무도 위로할 수 없는 절망의 바닥을 보았다 바닥 밑에 희망이 우글우글 숨어 있을 거라고 거짓말했다 한장을 넘겨보아도 똑같은 달의 연속이었다 못 하는 게 없는 것보다 어쨌거나 버티는 게 중요했다 바닥 밑에 바닥, 바닥 밑에 바닥이 있을 뿐이라고 그럼에도 우리는 바닥에 미세한 금들이 소용돌이치는 것을 보았다 바닥의 목소리가 뛰어올라 공중에서 사라질때까지 당신의 박수 소리가 하늘 끝에서 별처럼 빛날 때까지 오늘도 달력을 넘기는 것이다 우리에게 일어나는 슬픔은 겨우 손톱만큼의 조각 당신의 애인에게서 내일의 꿈을 들었다 - 슬픔은 겨우 손톱만큼의 조각(창비, 2023) 2023. 9. 25. 가을폭포 - 정호승 가을폭포 정호승 술을 마셨으면 이제 잔을 놓고 가을폭포로 가라 가을폭포는 낙엽이 질 때마다 점점 더 깊은 산 속으로 걸어 들어가 외로운 산새의 주검 곁에 누워 한 점 첫눈이 되기를 기다리나니 술이 취했으면 이제 잔을 놓고 일어나 가을폭포로 가라 우리의 가슴속으로 흐르던 맑은 물소리는 어느덧 끊어지고 삿대질을 하며 서로의 인생을 욕하는 소리만 어지럽게 흘러가 마음이 가난한 물고기 한 마리 폭포의 물줄기를 박차고 튀어나와 푸른 하늘 위에 퍼덕이나니 술이 취했으면 이제 잔을 놓고 가을폭포로 가서 몸을 던져라 곧은 폭포의 물줄기도 가늘게 굽었다 휘어진다 휘어져 굽은 폭포가 더 아름다운 밤 초승달도 가을폭포에 걸리었다 - 외로우니까 사람이다(창비, 2021) 2023. 8. 25. 나의 소원 - 정호승 나의 소원 정호승 내가 죽기 전에 꼭 한번 해보고 싶은 일은 철도 기관사가 되는 일이다 서울역에서 승객이 가득 탄 기차를 몰고 멀리 여수나 목포로 떠나는 일이다 신의주로 양강도 백두산으로 떠나는 일이다 내가 가지 않으면 안 되는 언젠가 꼭 한번은 가보고 죽어야 하는 인간의 진리의 길을 향해 침목을 깔고 나만의 선로를 놓아 세상 사람들 모두 잠든 새벽에 기관실에 높이 앉아 바다를 향해 달리는 일이다 차창을 스치는 갈매기와 섬들에게 손을 흔들고 바다에 내린 승객들로 하여금 수평선 위를 하루 종일 산책하게 하는 일이다 무인도에도 잠시 머물러 인생의 썰물과 밀물을 오랫동안 바라보게 하고 어느 봄날에 다시 기차를 몰고 평양을 지나 백두산역을 향해 달리는 일이다 백두산이 보이는 기관실에 높이 앉아 천지의 깊고 고요.. 2023. 7. 25. 이전 1 ··· 4 5 6 7 8 9 10 ··· 33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