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마음거울52

<제92호> 시를 들려줘서 고마워_박현경(교사) ‘지각시’. 지각하면 외우는 시(詩). 우리 반 교실에서 자주 쓰이는 단어다. 처음 교사가 됐을 때, 반복해서 지각을 하는 학생들에게 자꾸 화가 났다. 그 학생들에게는 지각하는 습관을 안 고치면 나중에 사회생활을 어떻게 하려고 그러느냐, 등교 시간도 하나의 약속인데 약속을 계속 어기면 신뢰할 수 없는 사람이 된다는 등의 따분한 이야기를 격앙된 어조로 늘어놓곤 했지만, 정말로 그들의 미래가 걱정돼서 화를 낸 건 아니었다. 돌이켜 보면 내 분노의 이유는 두려움이었다. ‘나의 지속적인 지도에도 불구하고 이 친구들이 행동을 바꾸지 않고 계속해서 지각을 한다는 건 내가 무능한 교사라는 증거가 아닐까? 이러다 내 통제를 벗어나는 학생들이 점점 더 늘어나면 어쩌지?’ 지금 생각하면 안쓰럽고 웃음이 나온다. 자기 고유.. 2020. 1. 8.
<제91호> 결코 쓸모없지 않을 거라고_박현경(교사) 결혼 전, 남편과 함께 살기로 마음먹었을 때 한 가지 걱정이 된 건 고양이였다. 이 사람과 같이 산다는 건 그와 수년째 함께 지내 온 고양이 ‘왕순이’랑도 한 식구가 되는 것을 의미했다. 이 털북숭이 생명체는 아마도 나의 고요를 흐트러뜨릴 거야. 매일 아침 짧게라도 명상하는 시간이 내겐 반드시 필요한데, 차분히 그림 그리고 책 읽고 글 쓰는 시간이 너무나 소중한데, 남편은 이런 나를 잘 이해하고 배려해 주지만, 말이 통하지 않는 고양이는? 고양이가 부산스럽게 굴어서 더 이상 명상도, 그림도, 책 읽기도, 글쓰기도 제대로 못하게 되면 어쩌지? 내 소중한 고요를 침해당할까 봐 두려웠다. 왕순이랑 함께 지낸 지 4년 반이 넘은 지금에 와서 생각하면 정말이지 공연한 걱정이었다. 내 옆이나 무릎 위에 앉아 갸르릉.. 2019. 12. 11.
<제90호> 힘_박현경(교사) 후두둑, 후두두둑. 빗방울을 흩뿌리는 하늘이 야속했다. 우산 없이 집을 나선 아침. 여느 때처럼 등에는 백팩, 어깨엔 도시락 가방을 메고 걷는 출근길. 빗방울은 점점 굵어져 빗줄기로 변했고 나는 꼼짝없이 비를 맞으며 걸었다. 비를 피할 곳도 마땅치 않았거니와, 혹시 그럴 장소가 있다 해도 비가 그치길 기다리다가는 학교에 늦을 수 있기 때문이다. 도착할 즈음이면 머리고 옷이고 양말이고 다 흠뻑 젖어 있을 텐데, 처량한 꼴로 1교시 수업에 들어가게 됐다고 속으로 투덜대며 조금이라도 덜 젖기 위해 발걸음을 재촉했다. 승용차들이 한 대 두 대 빠르게 나를 스쳐 지나갈 때마다 내 모습이 더 처량하게 느껴졌다. 그러던 중 갑자기 뒤통수 너머에서 들려오는 “화작 쌤!” 하는 소리. (‘화작 쌤’이란 ‘화법과 작문’ .. 2019. 12. 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