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식지/산 위에서 부는 바람97 무해한 무해한 잔디 나는 무해한 존재이고 싶었다. 언 강 위에 떠 있는 배처럼 한겨울 움직이지 못하여도 한탄하거나 춥다고 말하지 않으며, 따뜻한 봄이 되어 물이 흐를 때까지 기다렸다가 함께 흐르는 존재. 한탄은 사치이고, 춥다고 말하는 것은 소음이라 여겼다. 혹은 내 안의 온기로 바깥의 차가움을 충분히 견디어낼 수 있다고 자만했던 것 같기도 하다. 겨울날에도 해는 늘 떠오르고 등 뒤로 머리 위로 닿는 햇살의 온기로 충분하다고 스스로에게 외치며, 내가 생각한 대로 삶이 흐르지 않아도, 삶이 흘러도 그저 묵묵히 흘러 여기까지 왔다. 무해한 존재이고 싶다는 마음으로. 무해하다는 것은 무엇일까? 최대한 남에게 폐를 끼치지 않는 것일까? 최대한 에너지를 아껴 쓰고, 그 에너지 앞에 나를 떨게 하는 것일까? 최대한 물을 .. 2023. 12. 26. 보살핌 보살핌 잔디 어젯밤, 의자에 반쯤 걸쳐 앉아 허리를 좀 쭉 펴고, 발바닥을 방바닥에 대고 나무가 되는 상상을 하며 한 시간쯤 미술치료 작업을 했다. 줌을 통해 마주한 치료사의 안내에 따라 나무줄기에 적어보고, 눈으로 읽고, 소리 내어 나 자신에게 들려주며 울컥하는 감동의 순간을 맞았다. 두 권의 책을 읽으며 마음속으로 만나고 나도 가까이에서 몸으로 이분을 한 번 만나보았으면 좋겠다 싶었다. 이미 글로 만났지만. 그분이 스물 한 명의 다른 미술치료사분들과 연대하여 준비한 닷새간의 무료 여정. 오픈채팅방에 닷새 동안의 준비물과 안내가 공지되었고, 친구들에게도 공유하였고, 참여하였다. 제주에 살고 있는, 떨지 않는 목소리의 그는 벅차 보였고, 몹시 떨린다고 숨을 한 번 크게 내쉬고, 그저 나누면서도 참여해 주.. 2023. 11. 27. 따뜻함을 바르기 따뜻함을 바르기 잔디 아침에 빨래바구니를 옆구리에 끼고 문을 열고 집 밖으로 나가면 눈길 닿는 곳에, 한 아름 초록 이파리와 함께 아기 손톱만한 소국 꽃봉오리가 며칠째 앙증맞은 주먹을 꼬옥 쥔 채 벌리지 않다가, 오늘은 엄지손가락 한 개를 조심스레 펴듯 살짝 노란 빛깔을 보여주었다. 서늘한 가을바람 안에서, 한낮엔 바람도 어쩌지 못하는 따가운 가을 햇살 아래서. 어떤 노랑을 보면 웃음이 나오고, 어떤 노랑을 보면 눈물이 흐를 텐데 올해 소국이 보여주는 노랑을 만나면 어떤 감정이 나에게서 발견될까 궁금하다. 몇 번을 들어도 어색했던 강사와 아무리 무료강의라도 화면으로 마주 앉아있을 생각을 하니, 마음이 불편하여 들어가지 말까, 들어갈까 망설이다 그래도 한 문장은, 그래도 한 단어는 하는 기대를 가지고 귀에.. 2023. 10. 25. 이전 1 2 3 4 5 6 7 8 ··· 33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