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소식지/현경이랑 세상읽기34

<131호> 여러 줄의 우연 여러 줄의 우연 박현경(화가) 1. 모델의 움직임이 나를 사로잡았다. 그는 온 감정을 실어 팔을 뻗고 다리를 굽히고 목을 숙였다. 허공을 향해 던지는 눈빛에조차 어떤 간절함이 배어 있었다. 나는 그 움직임을 받아쓰기하듯 그림으로 옮겼다. 그날따라 내 손이랑 크레용이 뜻대로 잘 움직여 주는 것 같았다. 그렇게 서울에서 누드 크로키를 마치고 청주로 돌아오는 버스 안, 마음속 깊이 차오르는 뿌듯함에 혼자 웃었다. 2절지 수채화 용지를 펼치며 마음이 설렜다. 분무기 통에 물을 붓고 물감을 풀었다. 나무젓가락으로 휘저은 후 뚜껑을 닫고 힘껏 흔들었다. 신나게 흔든 다음, 종이에 물감을 뿌렸다. 분무기 속 보랏빛 물감이 촤악촤악 뿜어져 나오는 걸 느끼며 나는 조용한 해방감을 맛봤다. 보라색 물감이 없어 빨강과 파랑.. 2023. 3. 27.
<130호> 시간이 가르쳐 줄 거야 박현경(화가) ‘못하겠구나. 더는 정말 못하겠구나.’ 엉엉 울며 깨달았다. 몸으로 느껴지는 분명한 사실이었다. 교장의 전횡(專橫)에 맞서는 과정에서 우울증과 공황장애가 도진 나는 그렇게 1년 2개월 정도 학교를 쉬게 됐다. 2022년 3월 중순의 일이다. 다시는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학교에 관련된 소식을 듣거나 생각하기만 해도 며칠간 증상이 악화될 정도였다. 그렇지만 당장 퇴직을 하는 건 섣부른 결정일 수 있으니 쉬면서 천천히 생각하자고 마음먹었다. ‘복직할 것인가, 퇴직할 것인가?’란 질문을 머릿속 한켠에 구겨 담은 채 그림을 그리고 또 그렸다. 그러다 누군가 그 문제를 물으면 대답했다. “시간이 가르쳐 주겠죠.” 시간이 많이 흘렀다. 2023년 2월 10일. 파리 체류 31일차 아침. 벨빌(Bell.. 2023. 2. 27.
<129호> 나는 왜 여기에 나는 왜 여기에 박현경(화가) 내 그림들에 둘러싸여 이 글을 쓴다. 프랑스 파리 15구의 한 갤러리. 흰 벽에는 알록달록한 괴물들이 붙어 있고 벌거벗은 내 자신이 나를 내려다본다. 사람 얼굴이 달린 물고기가 아가미에서 꽃을 뿜고, 소년과 호랑이가 물고기를 타고 날아다닌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호기심 어린 눈길로 통유리문 안을 들여다보고, 가끔씩 들어와 그림들을 자세히 본다. 내게 질문하고, 질문하고, 또 질문한다. 일 년 전부터 계획해 준비한, 내가 원하던 공간과 시간. 감사하다. 겁이 많은 나는 전시회를 앞두고 불안했다. 작품들을 포장해 위탁 수하물로 비행기에 싣고서 열네 시간 반을 날아와, 네 박스나 되는 그 짐을 파리 공항에서 되찾은 후 갤러리까지 운반하고, 전시 오프닝 전날 내 의도대로 작품들을 설.. 2023. 1. 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