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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식지/현경이랑 세상읽기33

<133호> 너도 때때로 넘어지고 깨지겠지 너도 때때로 넘어지고 깨지겠지 박현경(화가) 복직을 했다. 우울증과 공황장애로 1년 2개월을 쉬는 동안, 복직을 할 것인가, 학교를 영영 떠날 것인가에 대한 길고도 진지한 고민을 거쳐, 시간이 가르쳐 준 답에 따라 복직을 했다. 휴직 기간은 소중한 시간이었다. 많이 아팠고, 많이 방황했고, 많이 슬펐지만, 온전히 내 것으로 내 앞에 펼쳐진 하루하루를 치열하게 실존(實存)해 살았다. 그 기간 책을 실컷 읽었는데, 어떤 문장들은 마음 깊이 자리 잡아 지워지지 않는다. 이를테면, ‘어쨌든 무릎이 깨졌다는 건 사랑했다는 뜻이다.’ - 안희연, 『당신이 좋아지면, 밤이 깊어지면』, 157쪽 그렇구나. 사랑했다는 뜻이구나. 내가 넘어져 상처가 난 건 사랑했다는 증거구나. 나는 늘 떠나고 싶어 하면서도 사실은 이 일.. 2023. 5. 26.
<132호> 네가 보고 싶어서 네가 보고 싶어서 박현경(화가) 1. 네가 보고 싶어서 ‘네가 보고 싶어서’, 너무 보고 싶어서 몸통에 커다란 눈이 돋았다. 그 커다란 눈에서는 뿔처럼 눈물방울들이 뻗어 나오고, 눈물방울마다에 또 눈이 돋아나 너를 찾아 헤맨다. 얼굴을 보면 울어서 부은 듯한 눈에, 기이하면서도 화가 난 것 같은 표정. 무슨 소리인가 어서 빨리 듣고 싶은 소리가 있는지, 귀는 정수리에 솟아 있다. 어딘가 깊은 곳을 향해 급히 달려가고 있는 모양. 이 그림을 그리기 얼마 전 10.29 참사가 있었다. 국가가 제 역할을 안 하는 사이에 죽어간 사람들이 너무 많았다. 이 참사에서 자식을 잃은 부모님들의 모습을 영상으로 보았다. 그 눈물과 분노를 보며 나도 함께 울었다. 그렇게 함께 우는 마음으로 이 그림을 그렸다. 그리다 보니.. 2023. 4. 24.
<131호> 여러 줄의 우연 여러 줄의 우연 박현경(화가) 1. 모델의 움직임이 나를 사로잡았다. 그는 온 감정을 실어 팔을 뻗고 다리를 굽히고 목을 숙였다. 허공을 향해 던지는 눈빛에조차 어떤 간절함이 배어 있었다. 나는 그 움직임을 받아쓰기하듯 그림으로 옮겼다. 그날따라 내 손이랑 크레용이 뜻대로 잘 움직여 주는 것 같았다. 그렇게 서울에서 누드 크로키를 마치고 청주로 돌아오는 버스 안, 마음속 깊이 차오르는 뿌듯함에 혼자 웃었다. 2절지 수채화 용지를 펼치며 마음이 설렜다. 분무기 통에 물을 붓고 물감을 풀었다. 나무젓가락으로 휘저은 후 뚜껑을 닫고 힘껏 흔들었다. 신나게 흔든 다음, 종이에 물감을 뿌렸다. 분무기 속 보랏빛 물감이 촤악촤악 뿜어져 나오는 걸 느끼며 나는 조용한 해방감을 맛봤다. 보라색 물감이 없어 빨강과 파랑.. 2023. 3. 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