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소식지/산 위에서 부는 바람96

<114호> 윤과 잔디_윤(잔디) 다시 가을. 숨이 차오른다. 가을이 되기 전까지도 가끔씩은 숨이 차지만, 입추부터 입동까지 그 어느 때보다 자주 숨이 차다. 가을은 가을이라서 좋고, 안개 낀 아침은 아스라하여서 좋은데, 안개 낀 가을 아침은 눈을 뜨지 않아도 숨이 몸속으로 들어가는 깊이를 짐작하며, 아 오늘 안개가 끼었구나 생각하면 역시나 짙은 안개가... 그윽한 안개를 바라보며 앉아 하나 둘 셋 넷 숨 배 가득히, 하나 둘 셋 넷 다섯 여섯 머금었던 숨을 오므린 입을 통해 다시 밖으로... 5분 정도 반복하며 밤새 쉬었던 몸을 살며시 달래서 깨운다. 꽉차있던 숨도 갈아주고... 몸속에 숨을 한꺼번에 많이 넣으려 몸속의 숨을 끝까지 다 짜내고, 열 셀 동안 숨을 참았다가 들이마셔 횡격막을 한껏 펼쳐주기도 하고... 이 과정을 반복하며,.. 2021. 10. 26.
<113호> 어머니와 잔디_잔디(允) 절벽에서 어깨에 시멘트를 혹은 널빤지를 메고, 널빤지 위를 한 발 한 발 걷는 잔도공을 본다. 중국의 아름다운 절경에 위험하지만, 관광객들이 안전하게 다닐 수 있도록 길을 만드는 사람들. 땅 위에서 1400km 위의 지점에 그들의 직장이 있다. 하늘이 주신 직장이라 고맙다 말하며, 발아래에는 바로 낭떠러지인 그 좁은 길을 하루에도 수십 차례 발 디딜 곳을 발바닥으로 짚어가며 일하는 사람들을 본다. 그러다 한 사람을 떠올린다. 나의 어머니. 학교 가려면 가방 찾아 헤매다 결국은 집에서 동생들을 돌보아야 했던 그 사람. 가방을 숨겨둔 사람은 그의 어머니. 첫 출산 때, 동네 산파 역할을 하던 어머니를 믿고 있다가, 숨어버린 어머니를 기다리다, 급히 택시를 불러 조산원으로 가서 출산했던 그 사람. 앓는 어머니.. 2021. 9. 30.
<112호> 세현과 잔디_잔디(允) 풀어도 풀어도 여전히 어딘가로 들어가지도 못한 짐과 짐 사이를 산책하듯, 거닐고 있을 무렵 그에게서 문자가 도착하였다. 오늘 출발할까요? 아, 그가 휴가를 맞아 나에게 온다고 했었지... 늘 혼자 보내던 휴가를 잠시, 나와 함께 보내고 싶다고 했었지... 일정을 서로 확인하고, 아이들이 격주 토요일 마다 참여하는 프로그램이 마치자마자 돌아오고, 남편과 비내리는 날의 짧은 데이트도 잠시 즐기고, 저녁을 잘 먹지 않는 그이지만, 저녁 식사로 옥수수 한 개를 먹고 싶다하여, 돌아오는 길에 옥수수를 구입하고, 서둘러, 드디어, 오후 여섯 시쯤 마당에 먼저 도착한 그와 만나, 눈으로 먼저 인사하고, 서로의 손을 꼭 잡았다. 스물 세 살 여름에 만나, 스물 다섯 살 겨울이 될 때까지 때때로 만나 서로를 나누던 그와.. 2021. 8. 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