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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식지/산 위에서 부는 바람96

<제84호> 봄 _잔디(允) ❀ 수탉 너는 밤에도 소리를 내고, 낮에도 소리를 내고, 새벽에도 소리를 낸다. 아주 큰 소리를. 어느 때는 듣기 어려운 소리를. 홀로 있는 너를 보며 나는, 때로는 왕따 당하고 있는가 하기도 하고, 때론 혼자 있기를 즐기는구나 여기기도 한다. 너의 목청소리를 어느 때는 다른 수탉의 소리와 다른 소리를 내고 있고나 생각하지만, 어느 때는 더 멋진 소리를 내려고 연습중인가 하는 생각도 한다. 그냥 너는 너를 살고 있을 텐데, 너의 소리를 들으면서, 닭장 한 모퉁이에서 먼 곳을 바라보며 소리 내는 너를 보며, 나는 너를 나로 여기기도 하고, 세상일을 너에게 빗대기도 하며, 많은 생각을 한다. ❀ 알 식구들이 먹다 남긴 음식물, 채소 부스러기를 들고 닭장에 들어간다. 꼭꼭꼭 소리를 내며, 닭은 나와 반대편 쪽.. 2019. 10. 24.
<제83호> 오래 된 일기_잔디(允)  사무실에서 삼월 안에 건강진단서를 제출하라기에 급히 보건소에 갔다. 등으로 받는 햇살이 좋은 날, 간단히 정말 간단히 검사받고는 보건소 마당 의자에 앉아, 봄 햇살을 받다가 나는, 보았다. 매실나무 가지에 피어난 연분홍빛 매화. 우리 집 마당가엔 아직, 하얀 꽃봉오리인데... 아, 피어났고나, 그대여...  숨이 더 깊고 고요한 숨을 맞이한다니, 나도 덩달아 나의 지나간 시간을 읽는다. 드문드문 썼던 일기. 숨에 원고를 보내기 위해, 아니 숨을 쉬기 위해 썼던 원고. 원고를 쓰려고 썼던 낙서 같은 기록. 그 기록들 중에 아직 수첩에 숨어있는 문장들. 단어들... 2013이란 숫자와 나란히 놓여 있는 글씨들... 그때의 상념과 별반 다르지 않은 오늘을 살고 있는 마음들. 아기 키우느라 허둥거리면서도 .. 2019. 10. 23.
<제82호> 보통의 겨울 달밤_잔디(允)  아침. 잠을 충분히 잘 잔 유쾌한 목소리로 아이가 묻는다. 아이 - “엄마, 분무기로 물 뿌려 줄까?” 나 - “...... 아니.(퉁명스런)(자다가 봉창 두드리나...)” 아이 - “(여전히 유쾌한 목소리로) 엄마는 꽃처럼 예쁘니까...” 나 - “ㅋㅋㅋ” 녀석의 유머가 그의 마음속에서도 웃음으로 피어나기를 바라는 보통의 아침.  스무 살에 혼인하여 그때의 나이보다 더 길게 스무 여섯 해를 한 남자와 오롯이 살아온 여자의 이야기를 듣는다. 아이 둘을 낳고, 그 아이들이 또한 스물이 넘어 자신을 살고 있지만, 그는 여전히, 그 곁을 지킨다. 농사라는 것이 누군가는 자영업이라 쉬고 싶을 때 쉴 수 있는 일이라 여기지만, 그럴 수 없는 일이다. 초록은 밤에도 자라고, 그가 몸이 아플 때에도 자라고, 그.. 2019. 10. 23.